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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이정재 칼럼] 리디노미네이션, 지금이 적기다

이정재 칼럼, 리디노미네이션 지금이 적기다


리디노미네이션, 지금이 적기다

-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변경)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낸 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다. 이 총재는 지난달 한은 국정감사에서 "(화폐단위를 낮추는) 화폐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화폐단위 변경은 액면가를 낮추는 방향, 예컨대 1,000원을 1원으로 바꿔쓰자는 것이다. 당장 여론이 들끓고 반대가 쏟아졌다. 한은은 같은 날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가 전제돼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다음날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진화에 나섰다.


화폐개혁의 필요성, OECD 중 달러환율이 네 자리인 유일한 나라


  국내 화폐 단위는 1962년 10환이 1원으로 바뀐 이후 53년째 그대로다. 달러 환율이 네 자리인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우리나라밖에 없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물가도 올랐는데 53년 전 단위를 사용하다 보니 불편이 작지 않다. 금융시장에는 경(京·10의 16승)이란 단위까지 등장했다. 그런데도 화폐 단위 변경 얘기만 나오면 극력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예금을 동결하고 사회적 혼란을 부추겼던 과거의 인플레이션 방지용 화폐개혁이 떠올라서 일지 모른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좀 다르다.


신권 발행 비용, 물가 상승 우려로 반대의 목소리도


  반대론의 큰 줄기는 대강 이렇다. 본질적 가치 변동 없이 신권을 발행·교환하고 시스템을 바꾸는 데 비용만 든다. 국민 혼란이 커지고 금융 시장이 불안해진다. 불필요하게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요컨대 불편·혼란 비용은 확실히 많이 드는 반면 화폐단위 변경을 통해 얻는 이득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원 단위 이하는 사용하지 않고, 높은 신용카드 사용률 덕에 가격 인상 요인은 적어


  과연 그런가. 예상되는 부작용을 한 번 따져보자. 우선 과연 리디노미네이션이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가의 문제다. 이런 전제가 성립하려면 화폐단위를 1,000분의 1로 변경하면 상인들이 슬쩍 자투리 가격을 올려야 한다. 그럴 가능성은 작다. 이미 10원 단위 이하는 잘 사용하지 않는 데다, 100원만 올려도 눈 밝은 소비자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신용카드 사용률이 세계 1위 수준이다. 가격 인상 요인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실제로 많은 커피숍·레스토랑·의류점에서 1,000분의 1로 낮춘 메뉴판을 사용하고 있다. 1만6,000원은 우수리를 떼고 10.6으로 쓰는 식이다. 그런데도 가격을 올렸다는 불만이나 혼란스럽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표시가 깔끔하게 보인다는 젊은이들이 많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지금이 부작용을 덜 할 수 있는 최적기


  2004년 박승 한은 총재 시절, 발권국장을 지내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던 김두경씨는" 2002년 유로화 도입 때 각국이 당시 환율대로 유로화로 바꾸었지만, 상반기 중 물가 상승은 0.2% 이내였다"며 "터키도 2005년에 0을 6개나 뗐지만, 물가가 안 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경제는 현재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화폐개혁의 부작용이 덜할 수 있는 지금이 최적기라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화폐 발행·교환 비용도 방법에 따라 최소화할 수 있다. 새로 지폐를 만들 때 현재의 지폐에서 0을 세 개만 떼어내고 쓰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지폐는 첨단 위폐방지 장치가 적용돼 있다. 별도의 추가 기술이나 디자인 변경이 필요치 않다. 지폐를 사실상 그대로 쓰면 ATM 교체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센서만 살짝 손질해주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10만 원짜리 고액권을 추가 발행하는 정도에 그치면 된다. 회계처리 시스템을 교체하는 데는 큰 혼란이 없을 것이다. 신·구 화폐를 1~2년 병행 사용하면 교체에 따른 혼란도 줄일 수 있다. 예금 동결 조치도 필요 없을 것이다. 장롱 속에 있는 돈도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양지로 빠져나올 수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의 편익과 소비 촉진을 위한 리디노미네이션, 우선 국민의 공감 형성이 필요해


  문제는 실행이다. 정치 여건상 박근혜 정부에선 쉽지 않아 보인다. 내년 4월이면 총선이다. 총선이 끝나면 곧 대선 캠페인이 시작될 것이다. 정치 일정에 잡혀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여력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화폐 단위 변경은 꼭 이 정부에서 마무리해야 할 과제도 아니다. 우선 국민적 공감대만이라도 만들어 기반을 닦는 게 중요하다. 국민 생활의 편익을 높이고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도 크다. 무엇보다 미국 달러와 1대 1 '맞짱'을 뜰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돈이 없으면 가오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소개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