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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오형규 칼럼] 행복의 상대성 원리

오형규 칼럼, 행복의 상대성 원리


행복의 상대성 원리

-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서울에는 흔하디흔한 게 세종시에서는 ‘귀하신 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별 게 다 뉴스거리가 된다. 최근 세종시에 CGV가 입점할 건물이 준공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CGV는 11월 개관이란다. 작년에는 세종시 정부청사에 스타벅스가 입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서울에 살 때는 찾지도 않던 것들이 세종시로 가면 명소, 맛집 또는 워너비로 둔갑한다. 만족도는 희소성에 의해 좌우되는 모양이다.


만족도는 희소성에 의해 좌우


  얼마 전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으로 유명한 변양호 전 국장이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획재정부를 들렀다. 후배들이 변 국장을 반겼지만, 더욱 환영받은 것은 그가 들고온 맥도날드 빅맥세트 50개였다. 모처럼 빅맥을 맞본 직원들은 거의 눈물이 날 듯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이 일화를 들려준 공무원의 덧붙인 말이 더 인상적이다. 빅맥세트 하나가 남았는데 서로들 ‘저걸 내가 챙기면 안 될까’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라는 것이었다. 세종시에는 현재 롯데리아가 두 곳 있다. 버거킹은 최근에야 들어갔다. 아직 없는 맥도날드가 들어서면 또 기삿거리가 될 것 같다.


끝이 좋아야 만족하는 피크-엔드 효과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나 만족감은 절대적일 수 없다. 물론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늘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타인과 비교해 자신이 낫다고 판단될 때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수준보다 비교에 민감하다. 미국에서도 아내가 만족하는 남편의 연봉은 처제의 남편(동서)보다 단돈 1달러만 더 많으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올림픽 시상대에서는 은메달리스트보다 동메달리스트의 표정이 밝다. 애석하게 금메달을 못 딴 은메달리스트에 비해 3-4위전에서 이겨 메달이라도 딴 동메달리스트의 만족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서 얘기하는 끝이 좋아야 만족한다는 피크-엔드 효과(Peak-end effect)다.

  지방으로 대거 이전한 공공기관 임직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000조 원의 유가증권을 관리하는 한국예탁결제원은 직원 500여 명 중 절반이 작년 말 부산으로 옮겨갔다. 직장이 여의도에서 부산까지 420㎞를 이동한 것이다. 회사 측은 걱정이 많았다. 서울에 생활기반이 갖춰진 직원들이 서로 안 가겠다고 버티고 그 과정에서 마찰, 갈등, 이탈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우였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한 각지의 혁신도시들이 대개는 허허벌판에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데 비해 부산의 상대적 편의성이 도드라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KTX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게 부산이니 그만하면 만족한다는 얘기다.


행복지수 1위였던 부탄, 컬러 TV 보급으로 화려한 바깥세상과 자신의 삶이 비교돼 만족도 낮아져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흔히 ‘은둔의 왕국’이라는 부탄을 꼽는다. 이 나라 국왕은 경제성장보다 국민행복을 중시해 선진국들도 한때 주목했다. 국가 운영지표도 국내총생산(GDP)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이다. 행복이 GDP 순이 아니라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나라다. 하지만 행복지수 1위로 알려진 부탄이 올해 갤럽의 행복도 조사에서는 미국 캐나다 등 10개국과 함께 공동 15위에 머물렀다. 물론 한국은 143개국 중 119위(59점)로 바닥권이고 톱10은 낙천적인 성향의 중남미 국가들로 채워졌다.

  부탄의 행복지수 순위가 예전만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탄 사람들은 애연가들이 많은데 정부가 담배 밀수를 금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컬러 TV 보급에 있었다. 컬러 TV에 비친 화려한 바깥세상이 자신들의 남루한 삶과 비교되면서 행복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유엔의 행복보고서를 보면 부탄의 행복지수 순위는 158개국 중 79위로 축 처진다. 유엔의 행복도 조사는 소득, 자유로운 삶, 부패 정도 등과 주거, 건강 등 생활여건을 토대로 매긴 순위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일본에 이어 47위였다. 톱10은 유럽과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들이 독차지했다. 갤럽의 주관적 행복지수와 유엔의 객관적 행복지수가 이렇게 차이가 크다. 이민 가고 싶은 나라를 물어봐도 또 달라진다. 멕시코의 행복지수는 미국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고 싶은 사람은 넘쳐나도 그 반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UNDP(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에서 한국은 15위로 올라간다. 한국인의 삶은 동일한데 119위, 47위, 15위로 순위가 제각각이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조사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약속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의 출범 슬로건‘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국민행복기금, 국민행복카드, 행복주택 등 유독 이름에 ‘행복’을 붙인 제도를 많이 도입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은 애초에 적절치 못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은 정부 슬로건이나 몇 가지 제도로 금방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질 만큼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정부가 행복을 강조할수록 현실에서 불행하다고 느낄 개연성이 높아진다.


개인의 행복은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 개인의 삶은 정부 제도로 좌우될 만큼 단순하지 않아


  삶이 고단해도 국민들이 살 만하다고 느끼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역할은 충분하다. 안전, 국방, 기회균등, 반부패 등의 기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만용이자 과욕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정부·여당이나, 왜 행복하게 못 해주냐고 비난하는 야당이나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미디어 인터넷 SNS를 통해 수시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할 때 행복감이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 1인당 소득이 5천 달러였던 때보다 3만 달러에 육박하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민이 훨씬 적은 이유다.

  행복은 무지개와 같아서 좇으면 좇을수록 멀어진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도 없고, 강제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없다. 출세한다고 행복해질까. 더구나 행복은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행복은 자존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슬며시 다가온다. 학창시절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며 하늘의 별을 볼 때, 최선을 다한 수험생이 합격증을 받아들 때, 땀방울이 떨어질 정도로 일한 뒤 막걸리 한 잔 들이켤 때, 피곤한 몸으로 귀가했을 때 반겨주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를 들을 때… 이런 때 행복하지 않은가.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