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개혁은 요란하면 안 된다
- 신연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최근 간부회의에서 금융개혁과 관련해 “아프리카 들소처럼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들소들은 사자와 악어들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르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묵묵히 앞으로 나가 새로운 초원에 도달한다’는 설명도 붙였다. 임 위원장은 올해 2월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일 때 금융당국에 “규제 완화는 절대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절절포’를 외쳐 주목을 받았다. 금융개혁을 강조하는 의지는 알겠으나 말이 화려해질수록 내용은 공허해지는 것 같은 걱정이 엄습한다.
금융당국이 개혁을 열심히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까지 나서서 금융개혁에 대해 말을 보탤수록 개혁의 초점이 뭔지 더 아리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금융위원회는 그동안 소비자 편의를 향상하고 손톱 및 가시 같은 규제들을 없애며 금융산업을 혁신하는 것을 금융개혁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대통령이 10월 들어 ‘금융권의 보신주의’를 공개적으로 질타한 데 이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4시에 문 닫는 은행이 지구촌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면서 혼란은 더 심해졌다.
“영업시간만 4시에 끝날 뿐이지 우리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다”라는 금융권의 반발도 반발이거니와 개혁의 방향에 대한 생각이 청와대, 기획재정부, 금융위, 모두 제각각인 것 아니냐는 추측들이 나왔다. 더구나 최 부총리가 “노동자의 힘이 너무 강해 금융개혁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개혁과제에 노사관계가 부가됐다. 정부 방침 변화에 따라 기업에 대한 대응도 왔다 갔다 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8월까지는 은행들에게 “비 올 때 우산 빼앗지 말라”고 했다가 10월 들어서는 “‘좀비기업’ 정리를 주저하는 은행들은 불이익을 주겠다”고 바뀌어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청와대는 최근 금융당국 관계자들을 수시로 불러 금융개혁의 대(對)국민 홍보 방안 등에 대해 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사람들은 “노동개혁은 논란도 많고 국민들의 관심이 커서 그런지 시끄럽긴 해도 뭔가 일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금융개혁은 너무 조용해 추진 사실 자체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금융 분야에서 큰 소리 나기를 바라면 ‘절대 절대’ 안 된다.
한국의 금융이 기업과 소비자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금융회사들은 해외 진출을 말하지만, 사실은 가계대출 이자와 수수료로 먹고사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과 유럽계 금융회사들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의 금융기관들까지 국내에 진출해 돈을 버는데 한국 금융회사들은 해외에서 이익을 내지 못해 금융이익의 역조 현상도 심하다. 한국 금융산업이 좀 더 선진화될 필요는 있지만, 갑자기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금융의 성격상 무리한 일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순위를 들어 한국의 금융산업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말들을 자꾸 한다. 미국, 영국 같은 선진국들의 금융산업을 부러워하는 모양이지만 바로 그 나라들이 실물 경제와 괴리된 금융 거품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잊은 모양이다. 부가가치 얘기가 나오면 금융 관계자들은 대개 “금융은 레버리지(leverage)를 일으키면 금방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실물보다 지나치게 커진 금융산업은 경제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자만이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한 나라의 경제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금융산업이 너무 커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아일랜드가 잘 보여주었다.
한국은 2011년만 해도 파생금융상품 거래 규모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그때는 한국 금융시장이 투기장이 된다면서 다들 걱정을 했고 금융당국이 규제를 강화해 지금은 세계 10위권으로 밀려났다. 요즘은 오히려 규제가 심해 증권시장 활성화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회적 이슈가 되면 지나치게 냉탕 온탕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우리 금융정책의 한계다.
한국의 금융산업이 더 발전할 여지가 많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중소기업에 담보를 요구하기보다 기술을 선별할 능력을 더 키워야 하며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산업혁신을 일으켜야 한다. 올 연말에 선정될 인터넷 전문은행을 위시해 핀테크가 활성화되면 기존 금융회사들은 위협을 받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변화에 나서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들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정부는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를 개혁하는 것과 아울러 관치(官治)금융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이 정부 들어 ‘관치금융에도 격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금융당국 책임자라면 개혁에 대한 청와대의 의중을 살피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낙하산 인사와 정치권의 외압을 막는 일에 직(職)을 걸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경제스토리 > 칼럼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용식 칼럼] 한국 정치는 왜 퇴행하는가? (17) | 2015.11.05 |
---|---|
CEO 스토리 #7. 아마존 제프 베조스와 교보그룹 신용호 회장의 공통점? 바로 '책' (2) | 2015.11.04 |
[정운갑 칼럼] 인적 네트워크, 창조적 발전의 시작 (0) | 2015.10.26 |
[이정재 칼럼] 리디노미네이션, 지금이 적기다 (4) | 201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