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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정주영 회장과 언론

정주영 회장과 언론

- 동아일보 신연수 논설위원

 

“저희 아버님은 신문을 참 열심히 읽으셨습니다. 아버님의 고향 강원도 통천 마을에는 유일하게 이장댁에서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답니다. 아버님은 매일 짬을 내 이장댁을 드나들면서 어른들이 돌려 읽고 난 신문을 얻어 읽으셨습니다. 현대그룹을 일군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한 번은 저희가 ‘왜 그렇게 신문을 열심히 읽느냐’고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은 ‘세상의 잘난 사람은 다 신문에 나온다’고 하셨어요.”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말 어느 언론인 모임에서 이 말을 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소학교(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청년 시절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더구나 신문에 사건 사고만 나오는 게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뛰어난 사람들의 스토리가 나온다는 것을 간파했다니 놀랍다.

 

정주영,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출처:YES24)


정 회장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보면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에 빠져들었다. 그는 그것이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매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적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변호사 허숭처럼 꼭 서울에 가서 고시 패스해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법학책을 사서 공부해 고시를 쳤지만 낙방했다.

  이광수, 흙(출처: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동네)


지금 짐작해보면 신문은 청년 정주영에게 새로운 세상,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등대 역할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소득은 보잘 것 없는 농사일에 비관했던 그는 신문을 보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신문에서 청진항과 제철공장의 건설이 시작되어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읽은 그는 무작정 가출을 했다. 처음 시도는 실패했지만 다시 도전했고, 그 후의 일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정 회장은 언론과 여러 가지 인연이 있다. 언론인들은 대부분 아는 ‘관훈클럽’이라는 중견 언론인 모임이 있다. 뉴스의 인물을 초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관훈토론회’로 유명하지만 이 밖에도 언론인들의 연구, 저술, 해외연수 활동을 지원하고 개발도상국 언론인들을 초청해 연수시킨다.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정신영, 정주영(출처:스카이데일리)


관훈클럽은 지금 회원 1,000명이 넘는 대표적인 언론인 단체로 성장했지만 1957년에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한 하숙집과 인연이 있는 18명으로 출발했다. 당시 미국 연수를 다녀온 젊은 기자들이 선진 언론에 충격을 받고 언론 발전과 언론인 친목을 위해 발족시켰다. 이 클럽의 초창기 회원 가운데 정신영 기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를 나와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 유학하던 중 장 폐색증이라는 급병을 얻어 객지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정주영 회장의 동생이었다. 6남 2녀의 장남이었던 정 회장은 막내인 정신영 기자를 무척 사랑했으며 총명한 동생의 장래에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갑작스런 동생의 사망에 통탄하고 애석해 하던 그는 동생의 동료 언론인들과 관훈클럽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됐다. 1977년 관훈클럽이 언론발전 활동을 위한 기금을 모금한다는 말을 듣고 정 회장은 지원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정신영,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관훈토론회(출처:스카이데일리)


자립을 원칙으로 하던 관훈클럽 회원들은 격론 끝에 정 회장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정 회장은 당시로선 큰돈 1억 원을 희사했다. 정 회장이 평소 낡은 구두 한 켤레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구두쇠’였음을 생각하면 아무 조건 없이 큰돈을 희사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신영 기자의 이름을 딴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언론인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정 회장과 현대그룹은 199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66억 8,000만 원의 기금을 출연했다.

 

인상 깊은 것은 자금을 지원한 이후다. 신영연구기금이 이사진 명단과 활동계획서를 만들어 정 회장에게 가져가니 그는 “왜 이런 걸 나한테 갖고 오느냐? 운영은 나한테 묻지 말고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며 보지도 않고 물리쳤다고 한다. “언론인들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려는 정 회장의 깊은 뜻이었다”고 선배 언론인들은 전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 회장의 원칙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관훈클럽과 신영연구기금은 지금도 그 어느 언론단체보다 정치계나 경제계로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정주영, 언론, 관훈클럽(출처:아산정주영닷컴)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정 회장은 평소 나라에 대해 “호주머니 지갑에 든 것만 내 돈이다. 나머지는 모두 사회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다” “우리가 잘 돼야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돼야 우리가 잘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언론에 대해서는 “신문이 항상 사회나 민심, 정치 경제의 흐름을 잘 살펴서, 만약 방향을 잘못 잡아 흘러나갈 때는 이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물꼬를 잘 터서 인도해주기를 우리는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론에 상업성이 심해지고, 사실(事實)이 아닌 이념과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는 요즘, 정 회장처럼 멀고 길게 언론을 생각했던 ‘큰 사람’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