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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경제에서 경계해야 할 극단논리

경제에서 경계해야 할 극단논리

- 정필모 KBS 보도위원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경제기사를 보다 보면, 극단적 논리에 치우쳤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특정 경제 현상의 원인이나 정책의 효과를 한쪽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기사가 많다는 얘기다. 이른바 ‘야마*’를 잘 잡아서 기사를 써야 한다고 믿는 기자 사회의 관행이 빚어낸 결과이다.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 관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설득하려다 보니 자신들에게 유리한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정책 효과를 포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언론과 경제 관료의 이런 태도는 경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생각까지 왜곡시킨다.

 

* ‘야마’는 ‘산’을 뜻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물건의 높은 부분이나 고비, 최고조라는 뜻도 있다. 한국 언론계에서 ‘야마를 잡는다’는 말은 기사를 작성할 때 기사로서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구성하고 부각할 측면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창섭(2010). 『한국 언론의 야마 관행과 뉴스의 현실 구성』,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쏠림, 언론, 규제완화


이런 문제의식에 이르다 보니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경제 정책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대학 시절 들었던 ‘경제 정책론’ 강의 첫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다. 기억을 더듬어 부연 설명을 하자면, “경제 정책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 효과가 있으면, 부정적 효과도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경제 성장(발전)에 치우치다 보면 안정(균형)이 깨지고, 안정(균형)에 역점을 두다 보면 성장(발전)에 지장을 주게 된다”고 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경제 정책에는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없는 만큼, 선악의 관점에서 경제 현상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 혹은 언론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경제 지식은 이런 인식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률이 높은 것이 무조건 좋다”거나 “경상수지는 흑자가 나야만 경제가 안정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발경제시대에 고도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득 수준을 높여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시대에는 성장지상주의가 절대선이었다. 경상수지 흑자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국내 자본이 부족했던 시대에 흑자가 나야만 외채 부담이 줄어드니 그런 생각이 팽배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잠재성장률을 넘어서는 과열 성장은 물가와 국제수지에 악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 역시 물가 관리를 어렵게 하고, 외환 관리에 적지 않은 비용 부담을 지우게 된다. 그런데도 일상화된 고용 불안과 몇 차례 외화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고도성장과 경상수지 흑자가 무조건 좋다는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규제, 양면성, 암

 

최근 많이 거론되고 있는 규제 완화를 둘러싸고도 극단논리가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규제는 암 덩어리다”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 등 고위 정책당국자가 나서서 그런 말을 강조하고, 주류 언론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쓰니 부지불식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규제는 절대악인가? 그렇지 않다. 규제도 상대적인 것이다. 과거에 필요했던 규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경이 변하면 쓸모없는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대로 달라진 환경에 따라 규제를 신설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환경 변화에 따라 재검토가 불가피하지만, 특정 시점에서 꼭 필요한 이른바 ‘착한 규제’도 적지 않다. 특히 시장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작동하기 위한 규율, 사람들의 안전이나 환경 보호를 위한 감시, 그리고 부정과 비리를 막기 위한 감독 등과 같은 규제는 지속가능한 성장의 전제조건이다.

 

선택, 조합


규제를 바라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 현상을 논할 때도 관료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언론조차 극단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쏠림현상은 별로 해소될 기미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런 인식의 편향성이 경제 운용에 있어서 자칫 합리적 정책 조합과 선택을 그르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 정책은 선택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없는 만큼 특정 공간에서, 혹은 특정 시점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선택의 결과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 경제단위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선택한 정책이 다른 경제단위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또 한 시점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선택한 정책도 시간이 지나면 부적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현상이나 정책 효과를 논할 때 어느 일면만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생각하는 극단논리를 경계해야 합리적 조합과 선택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