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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가계부채는 시한폭탄, 멈출 수 없다면 늦춰야

가계부채는 시한폭탄, 멈출 수 없다면 늦춰야

- 중앙일보 이정재 논설위원

 

최경환 경제팀이 출범 후 처음 한 일은 LTV(주택담보인정비율)·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완화한 것이다. LTV는 집값의 일정 수준 이상을 빌리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DTI는 소득이 감당할 만큼만 돈을 빌리도록 하는 빚 억제 장치다. 역대 금융위원장들이 가문의 보물처럼 지켜온  LTV·DTI는 한국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 가계부채가 늘어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이걸 단칼에 풀어헤치면서 최경환 부총리는 "낡은 규제를 풀어 부동산을 띄우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나라 경제가 워낙 안 좋으니 가계부채를 걱정할 때가 아니며, 지금 가계부채 수준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그리곤 7·24 부동산 대책의 핵심 내용에 LTV·DTI 등 금융규제 완화를 포함시켰다. 많은 전문가가 말렸지만 최 부총리는 듣지 않았다.

 

그 후 한 달여. 우려했던 대로 가계부채는 다시 급증하고 있다. LTV·DTI 완화가 적용된 8월 한 달 주택담보대출은 7월 말보다 4조 7,000억 원 늘었다. 지난 1~7월 평균 증가액 1조 3,000억 원의 3.5배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쓸 수 있는 돈(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60.7%(2013년말 기준)이다. 미국(115.1%)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5.7%, 2012년 기준)보다 많이 높다. 가계가 파산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늘어나는 속도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부채는 지난 5년간(2008~2013) 해마다 평균 8.7%씩 늘었다. 한국은행 통계도 비슷하다. 2008년 말 723조 원이던 가계부채는 지난해 말 1021조 원으로 연평균 8.2%씩 늘었다. 같은 기간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이 가계 빚을 줄여간 것과는 큰 차이다.

 

주택담보대출

 

양만 문제가 아니다. 질도 나쁘다. 이른바 생계형이 많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저신용자 대출이 전체 가계 대출의 20%를 차지한다. 이 중 3개 금융기관 이상에서 빚을 진 다중채무자가 10명 중 6명 꼴(63%)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자영업자다. 한 달 소득이 100만 원 안팎이라 돈을 벌어 이자도 갚지 못하는 소득 하위 20% 자영업자가 170만 명이나 된다.

 

자영업자에게 빚을 더 늘려주는 건 시한폭탄의 위력을 더 강화하는 꼴이다. 이미 자영업자의 빚이 많기도 하거니와 늘어나는 속도도 매우 빠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가 금융권에 진 빚은 평균 1억 2,000만 원쯤 된다. 지난해에만 18.5%가 늘었다. 임금근로자의 3배 정도다. 50대 베이비붐 세대의 빚은 평균 1억 8,000만 원에 이른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이 동네 문방구, 빵집, 식당 등 사양 업종에 몰리는 현실이다. 장사가 안되니 3년 내 대부분 망한다. 망할 때는 사채 돈이라도 끌어다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빚을 쉽게 낼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면 어떻게 되겠나. 그만큼 빚을 더 지게 되는 게 인간 심리다. 실제 주택담보대출자의 절반 정도는 돈을 빌려 생활과 경영에 쓰고 있다. 부동산 경기를 띄우려 금융규제를 완화했다지만 정부 생각대로 돈이 부동산으로 흘러갈지도 의문이란 얘기다.

 

가계부채

 

물론 최 부총리의 말마따나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경기 활성화의 대가로 가계부채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정부는 경제 활성화로 소득을 더 늘려 가계부채 비중을 떨어뜨리면 된다는 쪽이다. 그러나 규제를 풀었는데 소득은 안 늘고 가계 부채만 불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장률 높이기도 쉽지 않지만 성장을 한들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4.7%, 2013년 가계 가처분 소득 증가율)보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속도(6.0%, 2013년 가계신용 증가율)가 빠른 상황에선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를 가능한 늦춰야 한다.

 

가계빚, 가계부채

 

최 부총리는 여전히 "2금융권에서 1금융권으로 가계부채의 질이 좋아진 것"이라며 지난달 4조 원 넘게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과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있다. 낙관과 자신은 좋지만, 뭐든지 과하면 곤란하다. 특히 금융은 임계점에 이르면 해일이 일듯 붕괴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각별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까지 내린 만큼 가계부채의 증가속도는 더 가팔라질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안 터진다며 눈에 보이는 국가파탄의 뇌관을 방치해선 안 된다. 재정을 동원해 생계형 한계 대출자의 빚을 탕감해주는 식의 적극적인 정책도 고려할 만하다. 17년 전 외환위기, 6년 전 금융위기의 교훈을 기억해보라. 우리 경제는 이미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