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비디오, 퀵실버의 비애?
위 사진을 봤을 때, 슬로우 비디오 컨셉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답은 금방 나왔습니다. 동체 시력 발달로 남들보다 세상을 느리게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래서 차태현 씨가 썬글라스를 끼고 나옵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엑스맨의 퀵실버. 퀵실버 역시 자신이 너무나도 빠르기에 세상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일 테니까요. 다만 슬로우 비디오의 주인공은 퀵실버처럼 빠르진 않습니다. 오히려 뛰어난 동체시력에 따라주지 않는 체력으로 더 약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썬글라스 사이 세상과 거리를 둔 주인공이지만 사랑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느리게 보는 그에게 남들보다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첫사랑, 그녀가 나타난 겁니다.
그닥 돋보이지 못하는 슬로우의 의미
슬로우 비디오는 사실 거의 멜로입니다. 느리게 세상을 보는 주인공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는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첫사랑 코드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첫사랑 코드에 사회적 공기가 담겨있는 게 특이점. 예를 들어 정규직·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는 시선, 주인공의 슬로우 비디오는 능력이 아니라 병이라고 말하는 나레이션 등. 그런 편견과 고립 속에 오히려 폐쇄적인 CCTV로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이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그리는 그림과 영상이 연결되는 신기한 CCTV의 앵글 등 영상효과 역시 독특합니다.
하지만 결국 슬로우 비디오의 승부는 동체시력 코드를 어떻게 푸느냐에 달렸습니다. 주인공이 빠른 야구공을 쉽게 잡는 모습이라든지, 수십 개의 CCTV 채널에서 범죄자의 다음 동선을 예상하며 잡는 모습 등은 웃음으로 전환되죠. 여주인공과의 멜로가 시작되는 모습에서 이 순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슬로우~모션은 영화의 백미이자 끝판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죠. 실질적으로 슬로우 모션이 영화에서 크게 돋보이진 못하거든요. 오히려 초점은 주인공이 시력을 잃느냐 마느냐에 대한 구슬픔에 맞춰진 듯합니다. 슬로우 비디오에서 ‘슬로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슬로우=느리다=인생 느리게 걷기=힐링라이프으로 전환되는 주제의식이 한풀 꺽이는 모습입니다.
슬로우 비디오는 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CCTV에는 일상이 있지만 거기에는 각자의 삶이 있다고 강조하죠. 하지만 과합니다. 일상을 강조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입니다. 좋은 배경음악으로 꾸민다 해도 이야기의 부실함을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훈훈한 사람들의 일상보다 첫사랑 사수궐기의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함께하는 모습의 연결고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죠. 중요한 조연인 직장동료, 버스 기사, 폐휴지 줍는 꼬마 등과의 친밀관계가 뜬금없이 설정되고 전개됩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에피소드들이 없었는데 갑작스런 유대감을 보여 갸우뚱하게 됩니다. 차라리 멜로 라인을 줄이고 주변을 더 많이 바라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슬로우 비디오는 초창기 CCTV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CCTV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기 때문이겠죠. 슬로우비디오는 이런 부정적 요소를 어떻게 훈훈한 드라마와 연결하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주인공의 대단한 동체 시력때문에 CCTV 모니터링에 제격이라는 초반 아이디어와는 다르게 너무 첫사랑 관찰에만 내용을 쏟아 붓습니다. 여주인공의 동선을 알고 남주인공의 깜짝 서프라이즈가 훈훈함을 전하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저렇게 쓰라고 놔둔 CCTV가 아닐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CCTV와 주인공의 동체 시력의 대단함이 그렇게 잘 이어지지도 못하고요.
헬로우 고스트의 마지막 한 방, 슬로우 비디오에도?
초반 호기 있는 아이디어에 비해 중반부의 덧붙이는 살이 냉정하게 말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로우 슬로우하다 퀵퀵했던 김영탁 감독의 전작 헬로우 고스트가 있기에 슬로우 비디오에 미리 실망하기는 이릅니다. 사실 헬로우 고스트도 중반부 유머가 기대만큼 터지지 않았지만 강력한 마지막 한 방이 영화를 살렸죠. 슬로우 비디오에 기대했던 부분도 그겁니다. 역시나 슬로우 비디오도 처음보다 마지막이 좋았습니다. 비사회적 주인공의 혼자놀기 같은 것이 나중에 하나씩 연결되어 벅찬 무엇으로 나오는 부분이 감동적이었죠. 조금 아쉽고 지루해도 마지막을 위해 한 겹 한 겹 쌓아가던 김영탁 감독 연출은, 마치 반전 전문감독 M나이트 샤말란에게 따뜻한 면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슬로우 비디오는 오락적 재미로 보자면 선뜻 좋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서 밝혀지는 '삶의 체인지업'은 지금의 일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과하다고 생각했던 첫사랑 멜로도 감동적으로 덮습니다. 마치 영화 속 그림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한 컷 한 컷이 다 합쳐져 거대한 무엇이 되는 것처럼.
부분 부분은 아쉬움이 크지만 전체로 전해지는 감동은 좋은 것 같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목적지에 쉽게 도착할 수 있지만 그렇게 빨리 가는 동안 놓치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 소중한 순간을 살피며 잠시 느리게 걸으라는 교훈을 담은 슬로우 비디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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