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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기업 투자, 정부가 보채서 될 일인가

기업 투자, 정부가 보채서 될 일인가

- 조선일보 김기천 논설위원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던 2007년의 일입니다. 당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최고 강자였던 캐나다 RIM사의 창업주 마이크 라자리디스는 아이폰을 분해해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폰은 그때까지 휴대전화의 상식을 파괴하는 제품이었습니다. 아이폰은 OS가 메모리에서 700메가 바이트나 차지했고, 인터넷이 제대로 돌아가는 브라우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 RIM의 블랙베리는 OS 용량이 32메가 바이트에 불과했고, 브라우저의 기능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블랙베리, 애플, 맥

 
라자리디스는 “애플이 맥컴퓨터를 휴대폰 안에 구겨 넣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놀라운 제품이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데이터 사용량이 너무 커서 통신망에 큰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보였습니다. 기능이 많다 보니 배터리 수명이 짧아지는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단점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자리디스는 아이폰의 등장에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성공 가능성에는 조금 회의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판단착오였고, 블랙베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세계 휴대전화 업계의 제왕이었던 핀란드 노키아가 무너진 것 역시 아이폰의 파괴력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RIM과 노키아 모두 1~2년 뒤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 발 삐끗했다가 그대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신세가 됐습니다.


세계 TV산업의 패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나소닉은 2006년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2100억엔을 투자해 PDP공장을 증설하기로 했습니다. PDP TV 세계 1위였던 파나소닉이 생산 설비를 확충해 경쟁자들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공장이 완공된 2010년에는 이미 TV 시장의 중심이 PDP에서 LCD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결국 파나소닉은 막대한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TV 사업에서 철수했습니다. 히타치와 파이오니아 같은 다른 일본 가전업체들도 기술력만 믿고 PDP 사업에 올인했다가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투자하고 기술 개발에 노력해도 기업의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제품의 생산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선호–기호 역시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화무쌍해졌습니다. 그래서 파나소닉처럼 거액을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많습니다. 투자에 따른 위험 부담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커진 것입니다.

 

정부, 기업, 투자

 

정부가 최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해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물리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우리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도약하려면 기업 투자가 살아나야 합니다. 기업이 투자해야만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 정부가 투자 환경 개선에 애를 쓰면서 기업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투자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투자 실적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세금을 더 물리겠다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정부가 징세권까지 동원하며 기업에 투자를 강요하는 것은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나 통할 수 있던 방식입니다. 당시 정부는 기업 투자를 독려하면서 사실상 일정한 투자 수익을 보장해주기도 했습니다. 민간기업의 외자 도입에 지급보증을 서주기도 했고, 저금리의 정책 자금 지원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심지어 투자가 잘못되면 간척지라도 개발해서 손실을 메우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정경유착과 특혜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규제, 기업, 징세권

 

투자를 해서 성공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있다면 기업은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알아서 투자를 할 것입니다. 끊임 없이 새로운 투자 기회를 모색해야 하는 게 기업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크다고 해서 마냥 투자를 미루다가는 경쟁력을 잃고 도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보채지 않아도 기업은 투자를 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위험 부담과 책임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정부가 투자 위험을 줄여주거나 실패의 책임을 대신 떠안을 것도 아니면서 투자를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입니다. 정부가 할 일은 정책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업 투자가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투자하려고 해도 규제 때문에 안된다”는 말이라도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업 투자를 살리기 위한 정부 정책은 좀더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