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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창업주의 기억

창업주의 기억

- MBC 김상철 논설위원

 

지금은 재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남아있지 않다. 예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산업시찰이라는 것을 가곤 했다. 출입기자들과 회장단이 함께 버스를 타고 하루 이틀 몇 군데 산업시설들을 돌아보고 오는 행사였는데 회장단을 구성하는 재계 총수들과 기자들과의 격의 없는 자리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심심하지 않게 푸짐한 농담을 끊임없이 펼쳐주는 주인공들도 대개는 회장단중의 한 분이었다.

 

아산, 현대, 정주영, 회장(출처:한국경제)

 

경제기자생활을 오래하면서 어쩌다보니 몇 분 선대 기업인들을 알게 되었다. 회장실 소파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새벽마다 일어나면 오늘 할 일 때문에 가슴이 뛴다는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말을 듣던 기억도 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을까같은 원시적인 질문에 정 회장은 돈은 길바닥에 굴러다닌다면서 일찍 일어나 주어 담기만 하면 된다고 대답했었다. 연말 기자들과의 송년모임에서 듣던 정주영회장의 18번 <가는 세월>도 기억한다.

 

언제부터인가 회장들은 구름 속에 숨어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언론에 보도되는 사장단회의에서 했다는 회장의 말은 대개 그룹 홍보실에서 내놓은 보도 자료에 기초한 얘기지 직접 기자들이 듣고 쓴 경우는 거의 없다. 요즘은 기자들도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는 모양이다.  이런 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개 창업주에서 2세 혹은 3세로 넘어오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자들과 공개적으로 만나는 자리를 많이 가져야 자신감이 있는 것이고 기자들을 피하면 자신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할 얘기가 별로 없고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사업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면 굳이 만나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예전 선대 기업인들의 경우 사업에 도움이 되니까 만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굳이 만나자는데 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자세 아니었을까.

 

재계 2세 혹은 3세들을 만나서 받는 인상은 그 선대와는 많이 다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는 선대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예의도 바르고 매너도 좋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도 없다. 국제적인 조류에도 밝고 아는 것도 많다. 또 한 가지는 걱정도 많다. 환율도 걱정이고 정부의 정책도 걱정이고 언론환경도 걱정이다. 다른 기업들의 움직임도 물론 걱정이다. 미래는 불안하고 자신도 별로 없다. 좋게 얘기하면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기업가답지 않다.   

 

기업가정신, 혁신, 모험, 기업, 경제학자

 

경제학자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는 소유와 관리의 주체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혁신가다.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꾼다는 의미의 혁신은 항상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돼 왔다. Entrepreneur. 흔히 모험적인 사업가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 단어의 어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진정한 ‘기업가 정신’은 단지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 그 분야와 규모를 막론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시도는 항상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더 나은 것을 찾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

 

지금 한국의 청년들은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연간 45만 명의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10명중의 6명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을 선호하고 세 명은 안정적인 대기업을 찾는다. 재계 2세 혹은 3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치열한 세계시장의 경쟁을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다면서 차라리 사업을 정리하고 그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도 몇 보았다. 그러니 커피숍이나 수입차, 외국 브랜드의 레스토랑같은 사업에나 부지런히 진출하려 한다. 

 

기업가 정신, 회복, 기업인


혁신 국가 진입의 필수 요소는 창조적 도전을 감행하는 기업가 정신이라고 한다. 기업가 정신은 단순히 돈만 벌자는 상업주의는 아니다. 세상에 한번 왔으니 우주에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자는 스티브 잡스의 말은 기업가 정신의 요체일 것이다.

 

우리 경제의 최대 위협은 어쩌면 사라져가는 기업가 정신이 아닌가 한다. 실제 지금 재계에는 창업주가 거의 없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아예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욱 요즘 세대는 기억도 못할 율산이나 제세의 실패는 너무 아쉽다. 세계경영을 꿈꾸던 대우의 실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기업가 정신을 살리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일이야 말로 저성장 시대를 넘는 해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