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덕트 (Culducts : Culture + Product) : 한국은 IT 강국이지만 정작 우리가 기억하는 국산 제품은 많지 않습니다. 재조명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 제품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의미에서 ‘한국의 컬덕트’를 연재합니다. 컬덕트는 시대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을 준 제품은 물론, 비록 판매에서 실패했더라도 일부 마니아에게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제품도 포함됩니다.
지난 1분기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평판 디스플레이 TV 시장 점유율은 46% 정도입니다. 한국의 TV 회사 두 곳이 전 세계 고급 TV 시장의 50%를 장악한 것이죠. 그러나 한국 TV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저 200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갑작스럽게 점유율이 높아졌다고 추측할 뿐이죠.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한국 최초의 TV인 금성(현 LG)의 VD-191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니까요.
(출처:연합뉴스)
우선 국내 최초 영상 방송은 1961년 12월에 개국한 KBS에서 시작됩니다. 방송이 만들어지면 당연히 이를 수신할 수상기가 있어야 하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기술력이 부족해서 미국이나 일본 TV를 수입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냥 계속해서 쉽게 수입해서 써도 됐을 겁니다. 그러나 국산품 애용을 장려했던 그 당시 정부는 외화가 낭비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가장 큰 전자회사인 금성사에게 TV 생산을 의뢰하며 국내 최초 TV 개발 계획이 시작됩니다. 금성사는 1958년 설립된 회사로 국내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생산한 회사입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TV 생산을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네요.
더 큰 문제는 여론보다 기술력에 있었습니다. 금성은 1963년부터 TV 생산에 매달렸으나 부품 수입이 어렵고 TV를 만들 기술력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금성은 사내 디자이너였던 박용귀 씨를 포함해 기술연수팀을 일본의 히타치로 파견하게 됩니다.
박용귀 씨는 국내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로 꼽히는데요. 그는 히타치의 기술과 목업(Mock-up) 모델링 등 많은 부분을 배워와 TV를 완성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합니다. 사실 그 당시 금성 TV는 히타치의 TV를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기술은 물론 외형까지 거의 비슷했죠. 특히 TV 밑에 다리는 당시 한국의 좌식 생활방식과는 맞지 않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폄하만 할 수 없는 것은 금성 TV의 부품 국산화율이 50%를 넘겼다는 점입니다. 쉽게 부품만 수입해서 조립하는 게 아니라 국내 부품을 구해 어렵게 개발했다는 얘기죠. 이때의 노력이 지금의 LG전자를 만든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최초의 TV가 1966년 8월에 출시하게 됩니다. 개발을 시작한 지 4년만 이었죠. 이름은 VD-191. VD에서 V는 진공관(Vacuum)을 뜻하고, D는 Desk Type를 뜻합니다. 191에서 19는 19인치, 1은 첫 번째 모델을 뜻합니다. 정말 충실한 이름이었죠?
그 밖에 스펙은 흑백 전용에 100V 전용, 무게는 22kg, 다리는 떼거나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리모컨은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태어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네요. ^^;;;
재미있는 것은 LG가 2010년 14SR1EB이라는 이름의 14인치 브라운관 TV를 생산한 적이 있었는데요. 최초의 TV인 VD-191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디자인과는 다소 느낌도 다르고, 조작 스위치도 달라서 좀 의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 모델은 꽤 인기가 있었고, 최근에는 LG 클래식 TV라는 모델로 변형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다시 최초의 VD-191로 돌아가죠. 이 TV의 발매 가격은 6만 원대. 저렴하죠? 그런데 그 당시 월평균 소득이 1만 2천 원 정도입니다. 즉, 5개월 치 월급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던 셈이죠. 지금이라면 국산 자동차 한 대 값입니다. 잘 팔렸을까요?
잘 팔린 정도가 아닙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기 수요가 많아서 일반 판매가 아닌 추첨제로 판매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은행창구를 통해 판매 신청을 받았는데요. 경쟁률은 무려 20대 1이었고, 할부 판매는 50대 1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금성은 1966년까지 약 1만 대를 생산했는데요. 예약 물량이 너무 많아서 급기야 'TV 무소유 우선공급제'를 실시해서 자신의 가정에 TV가 없음을 증명해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리 인기가 있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프로레슬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프로레슬링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특히 김일 선수라는 박치기 제왕이 일본 선수들을 무너뜨릴 때, 한국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죠.
이렇게 당시의 TV는 단순히 신기한 문물이 아니라, 전 국민을 웃고 울게한 놀라운 기계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감동을 받았기에 지금 한국의 전자회사들이 TV 사업에 온 힘을 기울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일까요?
잠깐 다른 기업 얘기도 해볼까요? LG의 뒤를 이어 삼성전자는 1970년 일본 산요와 합작으로 TV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컬러TV는 1975년, 지금은 쇠락한 아남나쇼날(현 아남전자)가 최초로 개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컬러 TV가 소비를 조장한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국내 판매가 금지됩니다.
따라서 아남이 생산한 TV는 전량 수출하고, 실질적으로는 1980년대부터 컬러 TV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컬러 TV 생산을 시작한 지 불과 20년 만에 한국은 고급형 평판 디스플레이 TV에서 세계적인 리딩 기업인 삼성과 LG를 배출하게 됩니다. 역사만 살펴본다면 믿을 수 없는 결과이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다시 VD-191로 돌아가겠습니다. VD-191은 비록 어설펐지만 상당 부분 국산화에 성공했고, 국민들의 폭발적인 성원으로 인기를 끌며 국내 전자업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정부는 TV 보급을 위해 특별히 물품세와 특판세를 낮춰주며 제도를 완화했고, LG 역시 적정 이윤을 10% 정도로 잡으며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습니다. 기업의 적정이윤 선정과 정부의 세금 인하, 그리고 국민의 성원이 단기간에 빠른 TV보급을 이끌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역사 안에서, VD-191은 세계적인 TV 강국, 대한민국의 최초의 TV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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