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서로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관계가 어색해지거나 서먹해지는 원인이 되곤 하는데요. 자신의 부탁을 제대로 전달하고, 기분 좋은 거절과 승낙을 건넬 수 있는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은 없을까요? 소셜프렌즈 ‘김태훈’ 님이 미국의 스타트업 문화를 바탕으로 부탁을 질문으로 바꾸는 새로운 부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부담스러운 부탁을 슬기롭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최대한 정중한 표현으로 부탁하라? - 부탁의 어려움
‘사업에서 중요한 것은 판을 잘 짜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업을 할 때 결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며, 필요한 분야의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적재적소로 구성하는 것이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인데요. 사업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사람들을 찾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거절당하면 껄끄럽지 않을까, 부담스럽지만 거절하기 어려워 억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등의 걱정이 앞서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보니 뭔가를 부탁할 때에는 예의 있게 '실례지만, 혹시 이러이러한 것을 해 주실 수 있나요?'와 같은 장황한 표현을 쓰게 되는데요. 특히, 비즈니스 이메일을 보낼 때는 정중한 표현에 더욱 신경을 씁니다. 쉽고 과감하게 부탁을 하는 분들도 종종 계시지만, 대부분 부탁을 인사처럼 쉽게 전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부탁의 주체는 내가 아닌 일이 되어야 한다 - 부탁과 거절의 가벼움
미국에서 경험했던 스타트업 문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부탁과 거절의 가벼움’이었습니다. 쉽게 부탁하고 수락하거나 거절하며, 실질적으로 일이 작동하게끔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제가 있었던 미국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기관의 CEO도 저를 비롯한 한국 기업가들에게 ‘부탁 혹은 요청할 것이 있으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기업가들이 부탁과 요청에 다소 과하게 예의 바르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차이는 한 마디로 ‘일의 객관화’였습니다. 즉, ‘나와 일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과 관련하여 어떤 것을 부탁하거나 요청할 때 그것을 요청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일 자체가 되는 것이죠. 다음의 예를 통해 그 차이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탁의 주체가 ‘나’일 때, 일보다 인간관계가 중심
실례지만, 제가 ㅇㅇ 일을 하려 하는데 ㅁㅁ을 해주실 수 있나요? 혹시 어려우시다면 이 일에 적합한 아는 분이 계실까요?
주체가 ‘나’인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부탁한다면, 이와 같은 익숙한 문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질문에는 부탁하는 ‘나’와 부탁을 받는 ‘상대’가 모두 존재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데 부족함이 많아 그 능력을 갖춘 ‘당신’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이러한 요청을 보내는 뉘앙스랄까요. 일과 내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일의 주체가 나(사람)이기 때문에 이 부탁을 받는 상대도 나(사람)에게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거절할 때도 ‘이렇게 생각해주시고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그 일을 하기에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어 요청하신 일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지 못하여 송구하게 생각합니다’라는 식으로 일에 대한 내용 외에 부탁한 주체인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같이 따라오게 마련인데요. 그래서 ‘죄송’하거나 ‘송구’하거나 ‘실례’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일보다는 인간관계가 중심이 되어 사람 대 사람의 전인적이고 감정적인 대화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탁의 주체가 ‘일’일 때, 각자의 의견 교환일 뿐
ㅇㅇ 일이 실현되기 위해 ㅁㅁ 작업이 가능한가요? 혹은 적합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반대로 나와 일을 분리하여 객관화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묘하게도 이 질문에서 부탁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일’인데요. 상대방에게 일과 관련된 객관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답변도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예’ 혹은 ‘아니오’로 객관적인 전달이 가능한데요. 거절을 한다 해도 ‘능력 밖이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대신 이러이러한 사람이 그 일을 잘하니 연락해 보십시오’ 라고 정보를 전달하면 그만입니다. 감정적인 송구함이나 관계에 대한 불편함은 배제된 상태에서 부탁하는 주체와 부탁을 받는 주체, 그리고 일 자체가 각각 분리되어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일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는 식으로 부탁과 답변이 이루어집니다.
Ask로 부탁하고, 자신과 일을 분리하여 생각하라 - 부탁과 질문 사이
내가 있었던 Tech Ranch Austin
실제로 미국에서 스타트업 모임과 컨퍼런스에 참석해 보니 다들 너무나 쉽게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부탁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접한 미국 스타트업 문화에서 가장 적응 안 되고 신기했던 것 중 하나였는데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눠보니 이러이러한 분야 분들과 잘 아실 것 같은데 혹시 제 사업 관련해서 누구 재밌는 분 있나요?’ 라는 말을 건넵니다. 심지어 질문하기 전에 ‘당신 사업과 관련해서 아는 사람 있는데 연락 한 번 해보실래요?’ 등의 이야기가 마구 오고 가기도 합니다. 딱히 요청이나 부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질문과 대화일 뿐이죠. 그렇게 쉽게 부탁과 답변이 오고 가니 더 빠르게 적합한 사람과 조직을 찾을 수 있고 실질적으로 일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차이점이 왜 발생하며 이러한 점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고민해봐야 하는지 두 가지 포인트에서 생각해봤습니다.
언어의 차이 - Ask는 질문이자 부탁
먼저, 그 나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언어의 차이입니다. Ask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첫 번째로 ‘묻다, 물어보다’라는 뜻과 함께 ‘부탁하다, 요청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묻다'와 '부탁하다'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지만, 영어에서는 하나의 단어인 Ask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요. ‘묻다’는 ‘밥 먹었어?’ 등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에 대한 요청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부탁하다’는 ‘미안한데, 죄송하지만’ 등의 표현과 함께 상대에게 요청하는 인간관계적 소통의 뉘앙스가 강한데도 말이죠.
영어에서 Ask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는데, 거칠게 표현하자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부탁'과 '질문'이 크게 다르지 않게 인식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May I ask you something?’ 이라는 문장이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라는 의미와 ‘부탁 하나 해도 돼?’ 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말에서는 생소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을 나와 떨어뜨려 객관화시킨 상태에서의 부탁은 일반적인 질문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관적인 부탁을 객관적인 질문으로 인식하는 Ask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잘 이해하면 부탁을 더 효과적이고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고의 차이 - 회사가 곧 나, 내가 곧 회사?
일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또 있습니다. 스타트업 등 기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나 회사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제로 회사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나를 곧 회사, 회사는 곧 나’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내가 일하고, 책임지고, 부탁하는 등의 사고와 행동이 나타나게 된 것이죠. 물론, 일과 나를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내 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더 잘되게 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일과 내가 너무 가까워 오히려 객관적인 관점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탁이 아니라 질문을 건네자 -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일을 하며 누군가에게 부탁이나 요청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거나 부담이 느껴진다면, 앞서 언급한 질문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요청해 보세요. 나와 일을 분리하고 객관화시켜 ‘일이 되게끔 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작업이 필요한데 이런 것이 당신은 가능한가요?’ 라는 말이죠. 상대방도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이 일에 초점을 맞춰 답할 수 있게 되어 실질적인 일 진행에도 유리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이메일을 쓸 때 가끔 상대를 너무 인식하다 보니 부담스러운 만연체와 화려체를 늘어놓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럴 때도 일을 나에게서 분리해 나와 상대의 대화 주제로 놓고, 상대의 의견을 묻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 부담도 덜하고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견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무조건 더 우수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중하고 예의 넘치는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방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친절함을 느끼고,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렇듯 서로의 장점을 적절히 융합하면 지금까지 우리나 상대의 문화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레벨의 문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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