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스토리/칼럼노트

[박진용 칼럼] 구조조정, 총알, 그리고 '한국판' 양적완화



구조조정, 총알, 그리고 '한국판' 양적완화

- 박진용 뉴시스 부국장 겸 경제부장


  “한국은행이 최대한 빨리 기준금리를 제로(0%)로 내려야 한다.”

  지난해 11월이었다.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한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 석좌교수는 세계경제연구원 초청 조찬 강연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눈이 확 트이는 발언이었다.

  “금리를 무기의 하나로 생각한다면 기준금리를 0.25%씩 내리는 것은 효과가 없기 때문에 총알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통화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예기치 못한 수준으로 움직여 시장에 놀라움을 줘야 한다.”




  당시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반응이 어떨지 떠올려 봤다.

  예상대로였다. 그는 “(기준금리를) 제로(0)까지 낮춰야 한다는 주장은 과하다”며 “제로 금리까지 갔을 때의 부정적 영향을 간과한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준 금리를 급히 내려 유동성을 공급하면 환율은 급등하고 외국인 자금 유출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계부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견해였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손 교수 발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 우리는 이런 근본적 생각을 못 하는 것일까, 모두 어렵다고 하면서 경기를 살리기 위해 꼭 전통적 방식만 고집해야 하는 것일까, 왜 새롭고 참신한 생각을 못 하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의 주요 국가들제로금리를 통한 양적완화나, 마이너스 금리를 앞세워 경제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처지가 좀 더 나아서 이렇게 하지 않는가. 아니면 아이디어가 없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작은 개방국가로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기업들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고 아우성인데….’

  물론 이런 생각에는 양적완화나 마이너스 금리정책이 큰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방식과 시도를 통해 작금의 위기를 헤쳐나가려는 그들의 노력을 더 높이 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러던 차에 지난달 한국판 양적 완화를 골자로 하는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경제공약 발표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다. 솔직히 간만에 듣는 참신한 발상에 꽂혔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해 기업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고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주택담보부증권(MBS)도 가져와 주택담보대출 상환 기간을 장기 상환구조로 늘리는 방식으로 가계 부채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한국은행을 앞세워 우리 경제의 최대 현안인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부담 완화를 통해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현행법상 한국은행이 이들 채권을 직접 매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20대 국회의원 구성이 완료되는 대로 한국은행법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물론 여소야대의 국회로 당초 구상이 어그러졌지만.




  서두에 한국판 양적완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건 요즘 기업 구조조정이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유일호 경제부총리 ‘산업개혁’을 들고 나왔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사물 인터넷 등 신산업 투자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마침 현대중공업 3,000명 감원을 비롯해 조선업계에서 대대적인 해고가 있을 것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산업개혁이든 구조조정이든 본격화하면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로 나 앉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애석하고 안타깝지만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버금가는 구조조정이나 산업재편은 불가피한 일이다. 지금의 위기는 외환이나 금융사이드의 문제가 아니라 주력산업 전반이 경쟁력을 잃고 침몰해 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나 대량 실업 발생 등을 감안할 때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조조정은 2014년 말 삼성이나 한화의 경우처럼 시장원리에 따라 민간 주도의 자발적인 빅딜이 가장 좋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정부가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특히 조선이나 철강 등 대규모 설비·장치 산업의 경우 몇몇 기업들이 해당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들 기업이 자발적 인수합병을 하거나, 스스로 퇴출 결정을 내리는 걸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의 정책자금으로 버티면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정부가 부담을 무릅쓰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정부가 개입하더라도 부실기업을 정상기업에 떠맡도록 하는 게 어렵다는 점이다. 부실기업의 빚을 털어주고 인수한 정상기업이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상당한 ‘당근’을 안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부실기업에서 해고될 수많은 근로자들의 생활안정 및 재교육 등의 지원도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재원, 즉 총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알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현 정부로선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세월호다, 메르스로 인한 소비 위축이다 하면서 나랏곳간을 끌어다 쓸 대로 썼다. 지금은 더 이상 재정의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이라는 큰 현안을 앞두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한국판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건 이유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정부 재정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해 보자는 구상인 것이다.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었지만 한국판 양적완화 카드는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독립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국은행으로선 기분 좋을 리 없다. 이주열 총재가 "한은이 구조조정을 지원하더라도 법 테두리 내에서 중앙은행의 기본원칙 안에서 하겠다"는 견해를 밝힌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는 "일반적인 양적완화는 제로금리까지 내려가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다시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이고, 최근 말하는 한국형 양적완화는 구조조정 지원에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사용하는 의미"라며 "일반적인 양적완화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했다.

  또 “현재 금융시장 여건을 볼 때 산은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에 한은이 나설 때는 아니”라고도 했다. “정부가 산은의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면 방안을 마련하지 않겠냐”고도 했다. 정부와 국회가 법 개정을 해오면 모를까 한은이 먼저 양적 완화를 주도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밝힌 셈이다.

  한은의 견해에 동조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유동성 위기를 겪은 국가들이 금리를 0% 수준까지 내렸는데도 경기침체가 이어지자, 중앙은행이 직접 국채나 회사채 등 채권을 사들여 돈을 풀게 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제로금리 정책마저 무력화됐을 때 양적완화를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대표적이다.

  또 “가계가 빚을 갚아야 가계부채가 해소되는 것이지 정책 금융기관이 MBS를 사준다고 가계의 빚이 없어지겠느냐”는 힐난도 나온다.

  돈을 풀을 대로 푼 일본이나 유럽이 여전히 경기 침체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우리도 따라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니 이런 점들을 다 감안해서 선진국 형태의 ‘양적완화’를 하자는 게 아니다. 무제한으로 돈을 풀고 제로금리까지 금리를 낮추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준금리 인하보다는 가계부채와 부실기업 문제 등 취약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유동성을 공급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이나 가계부채 문제, 이 두 가지 현안을 해결하지 않고 경기 회복이나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는 요원하다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현안을 해결할 다른 방도나 묘안이 없다면 적극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판 양적완화를 시행한다고 전제한다면 산업은행에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그런 자금을 쥐여줄 경우 기대만큼 기업 구조조정의 중심축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대우조선해양 등의 부실 관리에서 보듯 산은이 구조조정을 이끌기는커녕 있는 계열로 편입한 기업조차 제대로 관리감독조차 못했다는 지적이 무성한 터이기 때문이다.

  또 가계부채를 경감시켜줄 경우 농가부채 경감 및 탕감처럼 모럴 해저드 문제는 없겠느냐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이를 방지할 대책도 함께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원 마련이 필수적인 만큼 한국판 양적완화는 국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단지 한국은행법을 개정해 돈을 어디에 어느 만큼 공급해 주는 문제뿐 아니라, 그 자금을 갖고 산업은행이 제대로 된 기업 구조조정을 해낼 수 있는 방도까지 고려하는 심사숙고와 숙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선거에 진 여당에서 나온 공약이라도 참신한 아이디어마저 사장 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