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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오형규 칼럼] 생큐! 익스큐즈 미!

오형규 칼럼_생큐! 익스큐즈 미!

생큐! 익스큐즈 미!

-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항공 마일리지가 200만 마일이 넘는 ‘투 밀리언 마일러’다.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 출신으로 세계 구석구석까지 출장을 다닌 덕이다. 수많은 나라를 가본 그에게 선진국과 후진국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대략 질서, 자유, 인권, 환경 같은 답을 예상하면서. 그런데 의외였다. “선진국일수록 생큐(Thank you)와 익스큐즈 미(Excuse me)를 자주 들을 수 있더라”는 것이었다.


오형규 칼럼_고맙습니다, 실례합니다에 인색한 우리

  듣고 보니 무릎을 치게 됐다. 구미 선진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생큐와 익스큐즈 미이다. 일본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 아리가토와 스미마셍 아닐까 싶다. 왜 선진국일수록 사람들은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 반면 우리는 왜 그런 말에 인색할까.


오형규 칼럼_ 무례한 행동을 하고도 미안하면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

  서울 거리에서 수시로 어깨를 부딪치지만, 좀체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발을 밟고도 미안한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음식점에서 아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고래고래 울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부모를 보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행여 종업원이 아이에게 주의를 줄 때 되레 화를 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버스에서 직접 목격한 광경도 그랬다. 버스가 달리는데 아이가 일어나 왔다 갔다 하자 운전기사가 앉아 있으라고 하자 아이는 얌전히 앉았다. 그런데 아이 엄마 왈, “아저씨는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이런 광경을 보면 누구나 눈살을 찌푸린다. 아저씨 아줌마로 부르기에는 성에 안 차 ‘꼰대’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개저씨’ ‘개줌마’까지 나간 판이다. ‘노인충’도 있지만 ‘개청년’ ‘개소년’도 있는 것을 보면 남녀노소 모두 타인들의 무례하고 배려 없는 행동에 불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한 당사자일 때는 반응이 또 다르다. 어깨를 부딪치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다짜고짜 목소리부터 높인다. 마치 ‘미안하면 지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매우 편리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사고방식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아비투스를 체득한 선진국

  선진국 국민들이 생큐, 익스큐즈 미를 잘 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친 결과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인주의에 기인한다. 개인주의는 나만 소중한 이기주의가 결코 아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지만, 개인주의 윤리에는 타협점이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올리버 웬델 홈스 대법관은 “주먹 뻗을 자유는 상대방 코앞에서 멈춘다”고 했듯이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까지만 허용된다. 일본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메이와쿠(迷惑) 문화가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나면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메이와쿠다. 그런 윤리의식이 지진을 겪고 굶주린 판국에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늘어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타인을 배려하는 ‘아비투스(habitus)’를 국민이 체득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비투스란 사회화 과정에서 후천적으로 길러진 개인의 성향체계를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아비투스는 사회적으로 상속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또 자식에게 가르치는 유무형의 관습인 셈이다.


법과 원칙 대신 연고와 정실주의가 작용하는 저신뢰 사회,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능할까

  물론 선진국은 대개 1인당 국민소득이 높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듯이 부유한 나라일수록 배려의 아비투스를 갖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는 선진국이 되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1인당 소득만 보면 중동의 석유부국들이 훨씬 높아도 그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만한 아비투스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 한국은 선진국이 되기 위한 물질적 필요조건은 갖춰졌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할 것이라는 근대적 시민의식까지 공유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우리’ 안에 있지 못하면 모두 남이라는 배타성이 깔려 있다. 그 ‘우리’는 무조건 편들어 주고 법과 원칙에 벗어난 어떤 일도 눈감아 준다. 법과 원칙 대신 연고와 정실주의가 작용하는 저신뢰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확산되길 기대하긴 어렵다. 타인을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늘 배려와 감사가 가능하겠는가.


오형규 칼럼_ 일상에서의 배려 부재, 백팩족, 쩍벌남, 노쇼족 등

  일상에서의 배려 부재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3대 민폐라는 ‘백팩족, 쩍벌남, 화장녀’는 오늘 출퇴근길에도 본다. 소위 ‘맘충’은 아이가 바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잘난 사람이 되기만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민폐족이 되고 조금만 지위나 재산을 가지면 ‘갑질’의 주인공이 된다. 인성교육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모의 몫이다.

  예약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No Show=예약부도)’도 마찬가지다. 음식점을 비롯해 병원, 도서관, 열차, 비행기, 호텔 등 예약을 받는 곳이면 어디나 흔한 게 노쇼다. 그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보든 말든 나만 편하면 그만이다. “내가 내 돈 내고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행동까지 고상하다는 보장은 없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멤버로 참여한 A포럼의 주최자가 귀띔해준 ‘15%의 법칙’이 그런 사례다. 참석 여부를 묻는 R.S.V.P.(회답 요망)에 답하고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15%쯤 된다고 한다. 동시에 참석 의사를 밝히지 않고 그냥 나오는 사람 역시 15%쯤 된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숫자는 대략 맞는다.


존중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배려해야

  배려 없는 사회에는 ‘중2병’ 환자들이 넘쳐난다. 중학교 2학년이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중2병에 걸린 듯 행동한다. 경적을 울렸다고 15㎞를 쫓아가 회칼로 위협하는가 하면, 비행기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고 몸싸움까지 벌이다 FBI에 연행된 치과의사도 있다. 회장님과 사모님들의 갑질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툭하면 욱하고, 목청을 돋우고, 원색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는 마치 성깔과 욕설의 하수구가 된 지 오래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이 일갈했던 “SNS는 인생 낭비”라는 말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자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배려해야만 한다. 예수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프로기사 조훈현 九단은 저서 <고수의 생각법>에서 “매너는 가르칠 수 있어도 인품은 못 가르친다고 했다. 가장 가난한 부모는 물려줄 돈이 없는 부모가 아니라 물려줄 정신세계가 없는 부모다”라고 했다. 나부터 반성한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