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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이정재 칼럼] 메르스, 귀차니즘의 승리

이정재 칼럼, 메르스 귀차니즘의 승리


메르스, 귀차니즘의 승리

-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준욱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명인이다. 사람 얼굴 잘못 알아보는 나도 그가 TV에 나오면 안다. 그는 잊을만하면, 결정적 순간이 되면 나타난다. 그가 TV에 나타났다는 것은 나라에 큰일이 생겼다는 것과 동의어다. 2003년 사스(급성중증호흡기질환) 때도, 2009년 신종플루 때도 그는 예의 숱 적은 머리, 투박한 얼굴과 표정으로 '국민 불안을 달래는' 브리핑을 했다.

  권준욱은 2009년 신종플루로 나라가 몇 달을 끙끙 앓고 난 이듬해, 그러니까 2010년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신은 왜 꼭 방심할 때, 가장 나른한 시간에 인간을 시험하는지…. 4월 24일 나른한 오후,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 신종플루의 등장이었다. (중략) 앞으로 보건의료 분야에서 국민의 건강을 책임질 모든 사람들이, 아니 나 자신 또는 똑똑한 후배들이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은  '모든 조각조각의 정보나 뉴스, 소식 그리고 외부 전화 특히 나른한 오후나 주말, 휴일에 나타나는 것들을 더더욱 조심할지어다."


이정재 칼럼노트- 사스와 신종플루의 경고에도 방심을 부른 귀차니즘


  그가 경고한 것은 바로 '귀차니즘'이다. 귀차니즘은 방심을 부르고 방심은 언젠가 꼭 큰 사고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의 경고로부터 6년. 어쩌면 우리는 과거에서 하나도 배우지 못했을까. 36명이 죽고 186명의 환자가 생겼으며 1만6,000명이 넘게 격리된 데는 방역 당국의 알량한 매뉴얼 타령이 있었다. 매뉴얼 타령의 속내는 뭔가. 바로 귀차니즘이다. 그 결과는 어땠나. 중국 네티즌에까지 비아냥 받는 나라 꼴, 힘든 데 더 힘들어진 경제, 근거 없는 공포와 분열... 한순간 누군가의 방심이 부른 대가치곤 과하지 않은가.


방역의 매뉴얼 타령과 검사 요청 묵살로 버린 골든타임 36시간


  복기해보면 가장 한심했던 게 5월 17일이다. 그날 삼성병원 감염내과 의사는 메르스 최초 환자 A씨에 대해 질병관리본부에 "메르스 검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담당자는 "검사 요건에 맞지 않는다. 다른 12가지 검사부터 하라"며 묵살했다고 한다. 12가지 검사를 했지만 아무 결과가 안 나오자 의사는 다시 메르스 검사를 요청했다. 이때도 담당자는 묵살했다고 한다. "(A씨가 다녀온) 바레인은 메르스 위험 지역이 아니다"라며. 골든타임 36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식한 일반인'도 아닌 종합병원의 감염내과 의사의 요청을 왜 묵살했을까. 짐작건대 그는 귀찮았을 것이다. "나른한 오후… 더더욱 조심할지어다"란 권준욱의 경고를 그는 잊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예전 신문사엔 밤마다 독자 제보용 전화가 빗발쳤다. 대부분 취객의 하소연이나 주정이 많았다. 바쁘고 고달픈 기자 생활, 일일이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선배들은 한 통의 전화라도 소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대부분 돌멩이지만 가끔 옥이 섞여 있다면서. 실제 전화 한 통 잘 받아 특종하고 명성 날린 기자도 꽤 있다. 반면 전화 한 통 잘못 받아 낙종하고 징계받은 기자도 부지기수다. 굳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상보다는 징계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귀차니즘이 직업 정신을 이긴 결과다. 제보 내용과 크기에 따라서는 왕왕 저 윗선까지 징계받곤 했다. 그러면 한동안 바짝 군기가 들어 벨이 울리자마자 전화통을 들어 올리곤 했다.


책임자에 대한 강력한 징계와 처벌 필요


  민간 언론사도 이럴진대, 하물며 국민 생명을 책임져야 할 질병관리본부임에야. 질병관리본부야말로 2003년 사스 사태 후 국민 안전과 생명을 지킬 범정부 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탄생한 조직 아닌가. 누구보다 방심의 치명적 위험을 잘 알고 대처해야 할 조직 아닌가.

  그런데도 방심과 실수가 되풀이되는 건 교훈이 부족해서다. 이쯤 되면 메르스 사태의 재발을 막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벌백계. 패가망신할 정도의 징계와 처벌이다. 조직을 바꾸고 시스템을 선진화하는 것은 다음 문제다. 사람이 먼저다. 아무리 좋은 조직, 시스템이라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메르스 징비록'을 쓰는 심정으로 무사와 안일을 철저히 밝혀 담당자는 물론 책임 있는 저 윗선까지 줄줄이 징계해야 한다. 그래야 6년 뒤 권준욱을 TV에서 다시 보지 않을 수 있다.


정부의 실망스런 태도, 실패와 실수를 교훈 삼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그러나 결과는 또 실망이다. 대통령은 두 달여가 지난 8월 초 보건복지부 장관을 의사 출신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메르스 징비록'을 마무리하려는 듯하다. 고작 이것뿐이라니. 이 정부는 실패나 실수에서 도대체 뭘 배우고 있단 말인가.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