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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갑을관계? 미국 독점금지법 역사에서 배울 점은?



미국의 독점금지법(Antitrust)은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그런데 초기 독점금지법을 보면 기업 결합, 끼워 팔기, 거래 계약, 판매 지역 제한, 재판매 가격 유지 등을 위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런 기업 행위가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경쟁자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어딘가 의심쩍은 기업 행위는 당연히 위법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때문에 독점금지법이 경쟁을 보호하기보다, 막연히 약자라고 생각했던 ‘경쟁자’만 보호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냉철한 판단이 없어 경쟁 그 자체와 소비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경쟁정책은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위의 사례처럼 위법으로 여겨지던 기업의 행위를 ‘합리의 원칙(rule of reason)’으로 봅니다. 즉, 기업 및 경제 주체들의 행위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따라서 면밀히 따져 봐야 한다는 입장으로 변했습니다.

위법이라 생각했던 행위들이 따지고 보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경쟁 행위였습니다. 궁극적으로 소비자 후생을 높여주었고, 시장의 형성과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반독점법(사진출처:패스트체인징 아메리카)


이런 시행착오로 인해 독점금지 판결이 한층 발전했습니다. 시장 참여자의 행동과 여러 경제 현상에 대하여 면밀한 분석이 이뤄졌습니다. 판단을 위한 노하우가 쌓여 갔지요. 그 결과로 대중과 여론에게 흔들린 감정적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물론 대중은 위와 같은 기술적 분석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의 여지를 남겨둘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해결책이 없다는 그 자체를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간이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서로의 필요와 효율에 의하여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교환을 이루고 협력 관계를 맺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이유가 만들어 낸 관계는 보는 시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최근 ‘갑을 관계’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한 단면을 ‘갑-을’ 이란 관계로 이름지어버리는 행위가 좋은 걸까요? 미국 반독점금지법 역사처럼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시작이 되는 건 아닐까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가 많습니다. 이런 관계들 전부 ‘갑-을’ 이라는 말로 규정해도 좋을까요? ‘갑을 관계’ 는 지배와 종속이란 의미를 포함합니다. 섣부른 규정이 냉철한 판단을 흐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갑의 위치에 있다고 하여, 그것이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을’ 의 위치에 있다고 무조건 동정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갑이나 을도 많은 사정이 있고, 말 못할 사연도 있을 겁니다.  ‘합리의 원칙’을 세운 미국 독점금지법의 역사적 교훈을 생각해보면 보아야겠습니다.
 
요즘 갑을 관계가 온 나라를 흔들고 있습니다. 여러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하루아침에 갑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거나, 상황에 따라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의 관계는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변합니다. 하지만 여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갑과 을이란 이름으로 집단이나 개인을 매도합니다.


반독점법(사진출처: 뉴스토마토)


미국 독점금지법의 역사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기업 행위를 판단하는 여러 원칙, 시장과 경쟁을 보호하는 원칙을 쌓았습니다. 그런 원칙이 없이 대중의 감정으로 관계를 이해하려 하면 안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원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미래세대에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기억될지 모릅니다.


인간이 대체로 이해에 좌우될지라도, 그 이해 자체와 모든 인간사는 전적으로 여론에 좌우된다

  - D. Hume -


복잡한 이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관계입니다. 상황의 진실을 파악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누군가 만든 ‘프레임’에 여론이 좌우됩니다. 혹시 ‘갑을 관계’ 가 정치적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람 하나를 바보 만드는 데는 그저 악의적인 ‘이름 짓기’ 한번이면 충분합니다.

변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