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인도 "한국이 필요 없다"고 한다
-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모처럼 출장 간 일본 도쿄의 서점가엔 혐한(嫌韓) 서적들이 곳곳에 꽂혀있었다. ‘혐한도(道)’나 ‘혐한 사상과 신보수론’ 같은 제목의 책은 그나마 이론서 냄새를 풍기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병들어가는 한류(韓流)의 여자’며 ‘날조하는 이웃 나라에 미래는 없다’처럼 대놓고 한국을 비하하는 책도 눈에 적지 않게 띈다. 편의점 가판대에 꽂힌 잡지에는 예외 없이 한국과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기사들이 한두 꼭지씩 들어있었다. 현장에서 체감한 일본의 혐한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그래도 경제는 다르지 않을까. 아무리 일본에서 혐한론이 극성이어도 경제계만큼은 한국과의 협력을 중요시할 터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한 주간지를 펼친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주간 다이아몬드(10월 31일호)’란 경제 전문 잡지인데, 한·일 비즈니스맨 6,000명에게 물어본 상대국에 대한 인식 조사를 특집 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설문에 응한 일본 쪽 응답자는 5,000명으로, 이들의 연봉은 415만 엔(약 3,900만 원) 이상이었다. 샘플 수가 충분하고 응답자의 소득 수준도 중간층 이상이어서 경제계의 여론을 반영한 신뢰도 높은 조사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좋아하는 나라’를 묻는 질문에 일본인 응답자들은 미국을 1위로 꼽았고, 독일·영국·호주 등의 순이었다.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11위였다. ‘싫어하는 나라’엔 중국이 1위였고, 한국이 2위였다. 한국인 응답자(1,000명)는 일본을 ‘좋아하는 나라’ 6위, ‘싫어하는 나라’ 2위에 올렸다. 양쪽 모두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비슷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다음 문항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상대국이 필요한 나라인가’를 묻는 질문에 일본 응답자는 77%가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전혀 필요 없다’가 49%, ‘그다지 필요 없다’가 28%였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현재 일본 기업에서 현업에 종사하는 중견 이상의 비즈니스맨들이다. 어느 나라나 비즈니스를 다루는 사람은 정치 논리보다 실용 논리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 경제인들마저 한국이 경제적으로 “필요 없다” 하고 있으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일 수교 이후 50년간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적자를 냈다. 50년간 누적 적자액이 5,164억 달러에 달한다. 부품·소재 산업에서 일본 의존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파는 일본은 큰소리치고, 사는 우리가 도리어 고개 숙이며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이다.
정작 아쉬운 쪽은 우리이니, 일본 경제인들이 한국이 필요 없다는 식의 소리를 해댈 수 있는 것이다. 부품·소재의 종속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일본 경제계의 오만한 혐한론을 꺾을 수 없다. 앞선 설문조사에서 한국 비즈니스맨들은 69%가 일본에 대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국가 간 영향력의 크기는 필요성에 비례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술이건, 노동력이건, 군사력이건, 문화적 매력이건 간에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 친하게 지낼 필요성을 느끼게 해야 혐한론이 사라진다. 결국, 경제력과 국력을 키우고 전략적 대외관계로 외교력을 극대화하는 길뿐이다. 힘도 없으면서 큰 소리로 도덕적 훈계만 해댄다고 일본이 착하게 개과천선하진 않는다.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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