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 국정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 이신우 서울경제 논설실장 한국 사회에 중고교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다.
국정 교과서 찬성론 측에서는 검정체제로 전환한 이후 대부분의 교과서가 지나칠 정도로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부추기거나 상대적으로 북한 체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개탄한다. 반면 국정 교과서 비판론자들은 정부가 역사관의 다양성을 옥죄려 한다면서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를 바꾸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까지 제기하고 있다.
하긴 국정화 찬반을 떠나 우리 청소년들이 배우는 중고등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적 이념에 꿰맞추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이승만이 친일 행각을 일삼았으며 이 대통령 때문에 남북분단이 됐다는 등 황당한 내용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묘사된다.
소련과 중국의 6·25전쟁 개입은 지원(支援)으로 미화하면서 유엔군 참전은 국제전 확대의 원인으로 표현한 부분도 있다. 주체사상과 북한의 자주노선을 소개하거나 심지어 천리마운동을 찬양하는 대목도 있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성공했다는 서술 부분에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역사교과서 집필과 교육 과정을 개선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보수·우파의 주장이나 논리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필자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무릅쓰고라도 국정화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국정화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본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결론부터 말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대충 그려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1986년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국사학과(일본사)에서 연수 중일 때다. 때마침 일본에서 총선이 치러진 해였다. 필자는 기자로서의 호기심으로 세미나에 출석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넌지시 어느 당을 지지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절대다수의 학생이 집권 보수 자민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진보·좌파 계열의 사회당에 표를 던지겠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한국 대학생들이라면 ‘쪽팔려서라도’ 마음속에 없는 지지 표명을 늘어놓을 텐데 너무나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1960년대 초반 출생으로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학교생활을 거쳐 온 세대다. 이 시기는 일본 사회 역시 지금의 한국처럼 진보·좌파 흐름이 지배하던 때였다. 아니, 필자의 지도교수(일본근대사 전공)가 들려준 그때 상황은 한국사회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지도교수는 대학생 시절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졸업과 동시에 탈당한 것은 공산당 내부의 행태와 이념 강요에 환멸을 느끼면서였다. 그리고는 이후 대학원 박사과정은 물론, 병아리 학자 시절 모두 보수·우파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1950∼1960년대는 일본에서 보수·우파가 완전히 왕따 당하던 시절이었다. 지식인들이 칼럼이나 논문 하나 발표하려 해도 보통 마음고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여론 매체를 진보·좌파 세력이 장악한 채 보수·우파 논객들에게는 좀처럼 발표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중고교 학생들이 일본판 전교조식 교육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도 학교생활 대부분 진보·좌파 이념으로부터 폭포수 같은 세례를 받아왔던 젊은이들이 1980년대 들어 대거 보수 자민당 지지로 돌아서 버린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 역시 일본의 1980년대처럼 표면적 현상과 심해의 저류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형성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회의 표면 곳곳에서 진보·좌파들이 오랜 세월 구축해놓았던 이념과 제도들의 피로현상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그 대표적 징후가 젊은 층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보수단체들이다. 지금의 20대 젊은이들은 30∼40대와도 현저히 다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제 명백해진 것은 고작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여부가 아니다. 시민 사회의 의식 흐름이 커다란 방향 전환을 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진보·좌파 세력은 머지않아 닥쳐올 이념적 퇴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부터 심사숙고해야 한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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