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과 국제정치
- 김상철 MBC 논설위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타결 직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협정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 같은 나라가 세계 경제규칙을 쓰도록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미국 언론에서도 협정의 경제적 효과나 고용 창출 효과 같은 부분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초 우리 정부는 TPP의 타결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처음부터 가입을 서두르지 않은 것은 중국을 의식한 탓도 있었지만, 그 장래를 밝게 보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잘못 판단한 셈이 됐다. 상황이 바뀐 것은 미국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큰 폭의 양보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대한 요구는 줄이고 스스로는 양보하면서 협정을 타결시켰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지난 1998년 8월 17일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저유가가 러시아경제에 치명타가 되었다. 러시아에 돈을 빌려준 채권국들은 당황했다. 독일은 305억 달러를 빌려준 최대 채권국이었다. 물론 국제사회의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채권이 71억 달러 밖에 안되는 미국으로서는 급할 게 없는 처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나섰다. 결국, 미국의 압력을 받은 IMF는 2년에 걸쳐 226억 달러의 자금지원을 약속한다.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망설였던 미국의 루빈 재무장관을 설득한 건 국무부와 국방부의 외교, 안보전문가들이었다. 국무부가 러시아에 대해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는 핵무기를 가진 나라라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될 경우 핵무기를 팔 수도 있게 될 것이고 이는 걷잡을 수 없는 핵 확산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는 데에는 정치적인 고려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을 부흥시킨 마셜 플랜은 서유럽의 경제부흥을 통해 미국의 수출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원조의 과정에서 미국 기업에 유리한 수많은 조건을 내세웠다. 원조로 식량을 수입할 때에는 반드시 미국에서 수입하도록 명시하였고, 원조에 의해 조달되는 재화의 50%는 반드시 미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규모의 인도적인 경제지원도 알고 보면 경제적인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하지만 마셜 플랜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소련을 의식한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다. 이미 소련의 영향권이 동유럽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공산주의가 서유럽으로 확대되는 것만은 봉쇄해야 했다. 정치적 목적이야말로 마셜 플랜의 더 큰 이유였다.
미국이 또 한국의 환율조작을 문제 삼고 있다. 미국은 해마다 두 번씩 각국의 환율 운영 상황에 대해 의회에 보고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환율조작국을 지정한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된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보복을 가할 수 있다. 미국 재무부는 반기보고서에서 한국이 달러화에 대한 원화가치 상승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미 정상회담 직전에도 한국과 미국 간에는 환율문제가 이슈가 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은 환율 조작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구를 한·미 관계 현황 공동설명서에 넣자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이 많다. 최근 2, 3년 동안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달러당 1,100원 선 안팎에서 큰 변동 없이 유지돼 왔다. 정작 큰 변동이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반면 미국은 우리나라와 함께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해온 일본과 중국에 대해선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지난 8월 중국이 위안화 환율 평가절하에 나섰을 때 미국 재무부는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한 조치로 이해한다고 논평했다. 문제 삼지 않겠다, 눈 감아 주겠다는 의미다. 일본의 경우는 더하다. 한때 1달러당 75엔대까지 떨어졌던 일본 엔화가 130엔대까지 오른 것에 대해 미국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불가피한 대응이라고 옹호했다. 오히려 지지를 표시한 셈이다. 중국한테는 감히 비난이 어렵고 일본은 미국과 똑같이 양적완화를 한 것이어서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일본의 경제회복은 재무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의 방위력 증강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정책에 부합한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은 중국을 견제한다는 차원에서 엔저에 대한 합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은 상황에서 미국이 공격할 수 있는 나라는 아시아에서 한국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세계에서 환율을 가장 편리하게 조작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돈만 찍어내면 된다. 미국의 중앙은행이 4조 달러에 이르는 돈을 풀었던 양적완화는 가장 편리한 환율조작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양적완화를 결정하면서 혹은 양적완화의 중단을 결정하면서 다른 나라들과 논의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양적완화에 대한 미국 재무차관의 논평은 미국은 성장촉진과 디플레이션 탈피를 위한 일본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회복을 중국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정치적 고려는 경제정책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 고려 없는 경제정책이 가능할까.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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