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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자유광장은 지금!

기업인들의 발목을 잡는 ‘배임죄’, 무엇이 문제길래?

기업 리스크 예방의 핵심은 준법경영. 하지만 이와 별개로 기업인들에게 기업 활동을 옭아매는 법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항간에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불릴 만큼, 적용 범위와 기준이 모호한 ‘배임죄’가 그것인데요.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오늘 내린 결정이 후에 정상적인 경영판단으로 인정될지, 배임죄로 처벌될지 몰라 보신경영, 소극적인 의사결정을 거듭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영 현실은 반영되지 않은 채,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는 배임죄! 지금, 자유광장이 최근 ‘헌법재판소의 배임죄 합헌 결정’으로 다시 불거진 배임죄의 문제점을 알기 쉽게 알려드립니다.

‘배임죄’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그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범죄. 우리나라에서 배임죄는 형법(업무상 배임), 특정경제가중처벌법(특정재산범죄의 가중처벌), 상법(특별배임죄)에 널리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벌로 강하게 다스리는 사안임에도,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를 위배하면 배임죄라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데요. 범죄 요건의 구체성, 명확성이 확연히 결여돼 있기 때문입니다.



경영판단 존중하며 기업가 정신 위축되지 않아야 합헌!

전경련은 최근 헌법재판소의 배임죄 합헌 결정을 계기로 경영판단 원칙을 상법에 명문화할 것을 법무부에 건의했습니다. 이미 지난해 말 규제기요틴 과제로 ‘배임죄 구성요건에 경영판단 원칙 도입’을 건의한 바 있는데요. 민관합동회의 결과 추가 논의 필요과제로 분류됐었습니다. 이번 법무부에 대한 건의는 이에 대한 추가 건의인 셈입니다.

대법원이 기업의 경영상 판단을 존중하며 배임죄 조항을 엄격히 적용하는 이 ‘경영상의 판단’에 관한 법리(‘경영판단의 원칙’)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평가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요? 바로 헌법재판소가 합헌 논거로 제시하고 있는 2002도4229판결부터 입니다.

판결의 핵심은 ‘원래 기업 경영에는 위험이 내재해 있으므로, 경영자가 기업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믿음으로 신중히 결정했다면 비록 그 예측이 빗나가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배임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까지 책임을 묻는다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될 뿐 아니라,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켜 사회적으로 손실이 크다는 것인데요. 국회 역시 작년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동일한 취지로 배임죄 제도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그때그때 다른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

배임죄 등 재산범죄 무죄율 도표


헌법재판소는 최근 부실대출혐의로 업무상 배임죄 유죄 판결을 받은 저축은행 회장들이 ‘배임죄 조항은 기업 활동 영역에 국가 형벌권이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헌법상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했는데요. 대법원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수용하고 있어 배임조항 자체가 위헌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법원 판결들을 분석해 보면, 헌법재판소가 합헌 논거로 제시한 대법원 2002도4229판결에서의 경영판단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인데요. 전경련이 이를 조사한 결과, 이 판결 이래 지금까지 경영판단 관련 배임죄 판례는 37건으로, 이 중 2002도4229판결을 인용하며 여기서 제시한 방법에 따라 실제 경영판단이 있었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한 것은 절반 정도인 18건에 불과했습니다. 또 37건 중 같은 사안을 두고도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 여부에 따라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판례도 12건이나 됐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따라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 여부와 유무죄 판단 방법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판례 동향을 수치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법원이 일관되게 경영판단 원칙을 수용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배임죄 관련 무죄율이 일반 범죄 무죄율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는 것도, 배임죄 적용을 두고 검찰 및 법원 간 판단 기준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경영판단의 원칙 명문화의 필요성


이 때문에 배임죄를 운영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의무를 다한 경우엔 후에 경영판단 실패로 귀결돼도 형벌로 다스리지 않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시하거나 판례상 원칙으로 확정해 운영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역시 헌법재판소의 합헌 취지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배임죄에 적용되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형법상 배임죄 조문에 명문화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일반범죄 조문에 기업 경영활동과 관련된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하는 것은 체계적이지 않을 수 있어, 기업 활동을 다루는 상법에 명문화해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국회에서도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하는 법안이 제출되어 계류 중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취지는 “경영 실패가 아닌, 사익 취득을 위한 의도적인 행위에만 배임죄를 적용해야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이 취지가 유지되려면, 무엇보다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 기업가 정신이 살아날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신사업 진출, 대형 인수합병, 구조조정 등 다양한 의사결정에서 기업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기업을 다시 뛰게 하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 본 포스팅은 전경련 기업정책팀 이정은 선임조사역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