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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스퀘어/요즘뜨는이야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10편의 영화, 그리고 감상기

 

<1> 해체

 

불어를 사용하는 캐나다 영화입니다. 아마 불어 사용자가 많은 퀘벡에서 찍은 모양입니다. 영화는 이미 가족이 해체된 채 홀로 살고 있는 노인을 비추면서 시작합니다. 아내와는 20년 전에 이혼했고 두 딸은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목장 수리와 양을 사육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주 드문 인적을 대신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노인의 공허한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해체>는 줄곧 극히 대사를 아끼면서 주인공의 삶을 관객으로 하여금 고스란히 체험하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지루한 반면에 너무나도 쓸쓸하고 적막한 그의 심정이 절절하게 전해지기도 합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 노인은 큰 딸로부터 이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걸 듣고 형편이 어려워질 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전부인 농장을 경매에 붙이고, 그것이 해체되어 사라져가는 것을 목도하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결말에 다다라 작은 딸과 실로 오랜만에 만난 노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농장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하지만 아니라고, 자신의 삶의 전부는 두 딸이라고, 그래서 큰 딸을 위해 기꺼이 농장을 포기한다고…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노인과 두 딸의 얼굴을 차례대로 비추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때 노인은 외롭고 침울한 표정이지만 두 딸은 각자 미소를 머금으면서 마칩니다.

 

저는 <해체>를 보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에 이다지도 허망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초라하고 희생적인 아버지상은 동일한 것 같네요.

 

 

 

<2> 호텔 누에바 이슬라

 

전주국제영화제든 부산국제영화제든, 모든 영화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평소 접하기 힘든 나라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주로 개봉하는 영화가 미국, 한국, 일본 등으로 한정적인 탓에 다른 나라의 그것을 극장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은데요. 다양한 나라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영화제입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쿠바 영화인 <호텔 누에바 이슬라>를 만날 수 있었는데요. 흔히 볼 수 없는 나라의 그것이라 그런지 무척 반가웠습니다.

 


 
<호텔 누에바 이슬라>는 같은 호텔이지만 얼마 전 개봉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공히 찬사를 얻었던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상과 풍부한 감각으로 치장했다면, <호텔 누에바 이슬라>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폐허와도 같은 호텔이 배경입니다. 이곳에서 기거하며 호텔을 재정비라도 하려는 듯한 주인공 역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볼품없는 남자입니다. 그는 매일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는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손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그 스스로는 호텔의 재건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할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남자를 카메라는 조용히 응시하기만 합니다. 앞서 소개한 <해체>처럼 <호텔 누에바 이슬라>도 주인공의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을 따라가는 것을 통해 어떤 질문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무가치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과연 관객은 남자의 하루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행위가 그에게는 전부였던 것인지, 혹은 과거에 화려했던 호텔이지만 시간이 흐른 현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겨진 세월무상의 메시지인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시대의 변화를 점점 무가치하다고 정의하며 방치하거나 없어지는 무언가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결국 <호텔 누에바 이슬라>는 남자가 마지막까지 호텔에 남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감독은 억지로 무가치한 것에서 그를 탈출시켜 가치 있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연출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주인공을 담으려는 노력이자 배려인 것입니다. 남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이 작품을 맘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3> 마녀

 

 

이 영화는 전체적인 구성이 어색해서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극 전반부를 제외하면 거의 흐름이 중구난방에 가까웠고 점점 비약적이고 과장스런 전개로 변했습니다.

 

단편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래 단편영화로 기획했었다고 합니다. 전반부는 독특한 캐릭터와 좋은 연기 그리고 전형적이지 않은 연출로 코믹 호러에 가까워 신선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끝에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여자가 정반대의 인물에게 앙심을 품는다는 내용도 시사성이 있었으나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중반부와 후반부는 거의 다른 영화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습니다. 감독의 취향을 역력하게 엿볼 수 있었는데, 이 역시도 GV에서 들으니 역시나 어렸을 때부터 공포영화를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것들이 장편으로 무리하게 이어진 탓인지 하나의 이야기로 어우러지지 못한 채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됐습니다.

 

 

 

<4> 프란시스 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을 안겨줬던 영화입니다. 작년이었나요? 이미 해외에서 상당한 호평을 얻어서 궁금했던 영화였는데 마침 전주국제영화에서 상영했기에 냉큼 봤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선택했지만 저는 대만족이었습니다. 각본보다는 연출이, 연출보다는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특별할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20대 중반의 여성이 단짝이었던 친구, 애인, 직장 등에서 모두 버림을 받지만 꿋꿋이 버티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행복한 현실을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안쓰러운 과정을 담는 카메라는 절대 프란시스를 비극으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현실적일 정도로 늘 들뜬 채로 사는 듯한 프란시스는 자신에게 닥친 역경에 주저앉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현재를 살아가려고 합니다. 참 독특한 캐릭터고 그걸 연기한 그레타 거윅의 연기는 훌륭하다는 말 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프란시스의 성격처럼 통통 튀고 과감한 편집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면서 초지일관 밝은 분위기로 영화를 끌고 갑니다. 흑백으로 담은 뉴욕의 풍경과 프란시스의 일상은 누가 봐도 누벨바그 영화에 대한 향수가 잔뜩 묻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현재와 낭만적인 과거를 대비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7월 개봉 예정이라고 하니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5> 그레이트 뷰티

 

아시다시피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던 작품입니다. <그레이트 뷰티>는 노년에 이른 작가의 시선을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 젭은 일찍이 저서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았던 작가지만 그 후로는 좀처럼 신작을 내놓지 않고 있어서 의문을 사는 인물입니다. 첫 작품의 성공으로 화려한 주류사회에 진입한 그는 연일 사교계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향락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이것이 젭으로 하여금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든 장애물이었습니다다. 허영과 환상에 사로잡힌 채로 현실과 인간에 대한 환멸만을 가진 채 더 이상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깨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레이트 뷰티>는 내내 젭을 둘러싼 주변의 치장된 세상과 인물을 보여주면서 종국에는 현실과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와 조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 속에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자신이 속하기도 한 예술로의 일반적 접근이 품은 허세도 지적합니다. 예술을 소비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예술가조차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것일 뿐, 그것의 진의와 가치는 뒤로 밀린 채 근원과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젭은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아온 노년의 수녀에게서 "중요한 것은 뿌리"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우리 자신의 내면과 기억 속에 있으나, 그것을 왜곡하거나 잊은 채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레이트 뷰티>를 보면 결말부 등에서 "모든 것은 속임수"라는 대사가 몇 번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나를 속이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허망한 결과를 낳을 뿐이겠죠.

 

<그레이트 뷰티>는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로마에서의 화려한 생활과 아름다운 풍경 등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다소 어렵더라도 관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도 아직 제대로 보고 이해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다시 한번 보려고 합니다. 다행히 6월에 개봉 예정이라고 하네요.

 

 

 

<6> 미쉘 우엘벡 납치사건

 

 

정말 독특하고 유쾌한 영화입니다. <미쉘 우엘벡 납치사건>은 실제로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미쉘 우엘벡이 실종됐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출연하여 연기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납치극과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납치범들이 복면도 쓰지 않은 채로 얼굴을 다 내보이고, 소설에서는 이런 경우에 납치한 사람을 죽인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의 그들은 미쉘 우엘벡에게 더없이 친절합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갑을 채웠지만 이것조차도 미쉘보다는 자신들에게 더 불편을 초래합니다.

 

마지막까지 영화는 왜 그들이 미쉘을 납치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지시한 대로 따랐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는 것에서는 어떤 반목이나 갈등이 아닌 기묘하고 야릇한 우정이 나타납니다. 작가 그 자신의 성향처럼 정부와 유럽에 대한 비판을 간간이 드러내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프랑스조차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없다고 합니다.

 

 

 

<7> 60만 번의 트라이

 

재일동포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주인공은 오사카에 있는 조선고급학교(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의 럭비부 선수들입니다. 재일동포로 자란 아이들이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고, 그걸 통해서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한 설움과 울분을 토해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학교에 정부의 지원이 끊긴 것도 그들의 분투에 장대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재일동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럭비라는 스포츠를 매개로 삼았다는 것에서 차별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60만 번의 트라이>라는 제목은 재일동포 60만 명의 바람을 이 럭비부가 짊어지고 경기에 임한다는 걸 표현한 것입니다. 상영이 끝난 후에는 반응이 제법 좋았고 GV 시간에 나온 질문을 봐도 관객에게 어떤 작품으로 다가갔을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썩 맘에 들진 않았습니다. 물론 재미는 좀 있었지만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선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연출자의 사심이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투영됐다는 것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이 감독이 왜 <60만 번의 트라이>를 힘겨운 시기에 끝끝내 만든 것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고도 남습니다.

 

편집하여 잘라내도 무방한 것은 물론이고 마땅히 그랬어야 할 부분까지도 그대로 살렸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GV에서 이것에 대한 질문이 나왔으나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의 시각을 감성적으로 조장하고 있습니다. 감독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관객도 저 아이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응원하라는 무언의 강요처럼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을 수는 있겠지만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섣부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아이들이 비정한 현실로 인해 맘껏 공부하고 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념과 정서는 혼재한 채로 그치는 것도 거슬렸습니다.

 

<60만 번의 트라이>가 품고 있는 이상적 가치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냉정한 현실에 비춰서 보자면 단순히 한민족이기에 우리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이성적 동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다시 남한인 또는 북한인으로 나뉘는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울러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지원하지 않는 이유도 정치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정서적으로 진한 여운을 남기려고만 하지 말고 "남한에서 스스로를 북한인으로 여기며 자랐을 저 아이들을 왜 도와야 하는가?"라는 냉정한 질문에 더 합당한 주장과 답을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8> 스틸 라이프


 
<프란시스 하>가 전주국제영화에서 가장 즐거웠던 영화라면 <스틸 라이프>는 비극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은 특이한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장례식을 다니면서 애도하는 그를 보며 장의사로 생각했지만 실은 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존이 하는 일은 뚜렷한 연고자 없이 홀로 사망한 사람을 거두고 장례를 치러주는 것입니다. 가족이 없다면 친구나 직장동료라도 찾아서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하는 걸 보면 무슨 사설탐정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 가는 길에 애도해줄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데다가 화장 대신 매장을 하니 자연스레 업무처리는 늦고 비용은 증가합니다. 그런 존을 못마땅하게 여긴 상사는 해고를 통보하고 마지막 업무만 남깁니다.

 


 
매번 존은 전화를 받고 고인이 머물렀던 거처에 가서 지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챙기는 것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 집에는 누군가가 머물렀던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다리가 부서진 의자에 받쳐진 책들, 주인의 형체를 따라 움푹 들어간 베개, 수많은 사진, 누추하지만 가지런하게 걸린 빨래 등은 고인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희미하게라도 증명합니다.

 

반면에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에게의 고인은 그저 지나간 시간 속에 스쳤던 별 의미 없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떤 이는 인간으로서의 발자취가 전혀 남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작해야 신분증이 전부입니다. 물건과 애완동물처럼 스스로 일방적인 소유가 가능한 것이라면 모를까, 서로 상존하고 대화하며 교류하는 것으로 쌓고 발전시켜야 하는 타인과의 관계는 그래서 더욱 어렵고도 필요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일 뿐이다"고 하는 냉소적인 상사와 달리 존은 항상 고인에게 예를 갖추려고 합니다. <스틸 라이프>의 우베르토 파졸리니 감독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존을 따라다니면서 끊임없이 의문을 가진 채로 영화를 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왜 타인과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또는 그것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쓸쓸한 죽음을 맞은 고인을 위해 단 한 명의 애도나마 더해주고자 노력했던 존도 스스로는 고립된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매우 무미건조한 일생을 보내던 그가 비로소 누군가와의 연을 이어가게 될 무렵에 뜻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합니다.

 

이 결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탄식과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삶은 예고 없이 언제든지 막을 내릴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 관계와 관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Still Life는 한 장의 사진처럼 멈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며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삶이란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고 정체된 셈이란 것이겠죠?

 

 

 

<9> 사무엘 풀러의 삶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태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누벨바그로부터의 애정을 한몸에 받았던 감독 중 한 명인 사무엘 풀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살아있었다면 100세 생일을 맞았을 그를 위해 딸인 사만다 풀러가 기념으로 직접 연출했다고 해서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감독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서 반갑기도 했고요. 
 


<사무엘 풀러의 삶>은 사무엘 풀러가 생전에 쓴 본인의 전기인 <세 번째 얼굴>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책은 본래 2,000페이지에 달했던 걸 줄이고 줄여서 600여 페이지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쉬운 면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상영시간이 80분에 불과한 다큐멘터리에 많은 걸 담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무엘 풀러는 워낙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서 어떻게 했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작품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딸이 연출한 덕분인지 정수는 다 담겼습니다. 기자로 시작해서 참전군인을 거쳐서 영화감독으로 지내기까지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놓치지 않고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건, 사무엘 풀러가 감독으로 활동하는 데 그의 과거 이력이 지대한 영감을 줬기 때문입니다. 기자로 일할 때 다뤘던 무수한 사건과 현장, 2차 세계대전에서 목격했던 참혹한 살상 등은 사무엘 풀러의 영화에서 내내 다뤄졌습니다.

 

특이하게도 사무엘 풀러가 쓴 자서전의 일부를 그와 함께 작업했고 존경하는 배우와 감독 등이 낭독하는 구성으로 이뤄져서 반가운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프랑코, 제니퍼 빌스, 로버트 캐러딘, 빌 듀크, 윌리엄 프리드킨, 조 단테, 마크 해밀, 빔 벤더스 등이 사무엘 풀러를 추억하면서 기꺼이 무료로 출연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니퍼 빌스와 마크 해밀, 빔 벤더스가 정말 반가웠습니다. 제니퍼 빌스는 많이 늙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름다웠고, 마크 해밀은 뭐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제 루크 스카이워커의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빔 벤더스는 여전히 멋진 할아버지더군요!

 

GV 시간에 참석한 사만다 풀러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조금이라도 아버지에 대해 젊은 세대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췄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많은 걸 사사한 스티븐 스필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콜세지 등은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을 받지만 정작 사무엘 풀러의 이름은 거의 잊힌 상태라는 것이 아쉽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도 하더군요. 감독의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사무엘 풀러의 삶>을 보면 왜 젊은 세대가 그를 알고 기억했으면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풀러는 마지막에 자신이 왜 자서전을 통해 구구절절 사연을 다 얘기했는지에 대해 밝히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마음을 유지하라!" (실은 이 뒤에 더 멋진 멘트가 있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미치겠네요) 사무엘 풀러는 생전에 할리우드 시스템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걸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반골로 취급을 받았지만 해외에서는 대단한 인기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모두가 사무엘 풀러처럼 기존의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는 패기를 가지길 바랍니다.

 

 

 

<10> 언더 더 스킨

 

전주국제영화제 마지막 관람작입니다. 몇 달 전에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부터 기다렸던 영환데 정말 기대하지 못했다가 우연히 상영하는 걸 알고 냉큼 관람했습니다. <언더 더 스킨>은 예고편에서 느꼈던 음침하고 괴이하며 퇴폐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가진 영화였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캐릭터는 외계인으로 지구에서 인간의 탈(Skin)을 쓰고 모종의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빼어난 미모와 몸매(특히 가슴!)로 남자를 유혹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암흑의 늪으로 빠뜨리는 일을 반복합니다. 매일 그렇게 지내던 중에 한 남자를 만나면서 잠깐의 혼란을 겪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언더 더 스킨>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결국 예고편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인간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뮤직비디오와 광고 감독 출신답게 조나단 글레이저가 또 한번 이미지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로 대사와 서사를 아끼면서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를 비롯한 영상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일면 <온리 갓 포기브스>를 연상시키기도 했으나 과도한 은유나 탐미적인 시도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에서는 달랐습니다. 사실 <언더 더 스킨>을 특별하게 보이게끔 하는 건 바로 이 조나단 글레이저의 기묘한 연출입니다. 초현실주의적이고 몽환적인 영상과 음악은 관객을 나른한 세계로 인도하는 동시에,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캐릭터에 십분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가졌습니다.

 


 
외계인을 다루는 SF 영화가 주로 범하는 오류는 다름 아닌 인격화입니다. 어차피 인간이 창조한 캐릭터니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례로 특히 할리우드 장르영화는 관습적으로 너무나도 쉽게 외계인을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구분하려고 하죠. 반면에 <언더 더 스킨>은 외계인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머물게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하나의 인위적인 발상이지만, 조나단 글레이저는 외계인을 무미건조한 냉혈한으로 두면서 인간과의 차별점을 확실하게 두고 유지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그의 연출은 이런 캐릭터에게 적합한 감정을 관객도 동일하게 일관적으로 유지하게끔 합니다. 이야기 또한 지극히 차분하고 몹시 정적이라서 자극은 거의 배제하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차차 동화하고 변화화는 면을 그린 끝에 결말은 씁쓸한 감정을 안기지만 역시 잔잔한 물결을 고수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더 더 스킨>을 통해 일반적이고 장르적인 재미를 기대하는 건 피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영화는 재미있지만 이 재미있다의 정의와 기준은 천차만별이란 사실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실험적인 성격도 짙은 편이라서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언더 더 스킨>이 과연 국내에서 개봉할지 어떨지도 의문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자니 한번 더 보고 싶어서 개봉을 바라지만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숱하게 본 영화와는 다른 독창적인 스타일을 보고 싶다면 <언더 더 스킨>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단, 단기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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