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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이신우 칼럼] 헬조선을 위하여

이신우 칼럼, 헬조선을 위하여


헬조선을 위하여

- 이신우 서울경제 논설실장


  “절망 코드야말로 한국 젊은 층의 신조어를 관통한다. 이들 신조어 중에서도 압권은 헬조선이다. 영어인 헬(Hell=지옥)은 이 신조어의 현대성을 부각하지만 ‘한국’도 아닌 ‘조선’은 이미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 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한다.”


이신우 칼럼,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뜻의 헬조선


  박노자 교수가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한겨레 2015년 9월 30일)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쓴 내용이다. 박 교수는 이어 한 세기 이전에 레닌이 제정러시아를 가리켜 “제국주의 세계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불렀다면서 한국사회를 제정러시아 끝자락과 비교하고 있다. 아니 더 낫다고 한다. 그래도 제정러시아는 1905년 혁명 이후로는 전 세계 혁명 전위의 위치에 올랐으나 대한민국은 그만도 못한 것 아니냐는 비웃음이다.

  헬조선을 놓고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내세우고 있지만, 이 정도쯤이야 이미 오래전 개그콘서트의 소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개그맨 박성광 씨가 2010년 개그 프로그램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에서 늘 내뱉은 대사가 있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다. 조상으로 따지자면 요즘 한참 나라 탓이나 하는 ‘헬조선’의 아브라함 격이다.


이신우 칼럼,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길 바란다 -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국가가 나한테…’는 아마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살짝 비튼 것이 아닌가 싶다. 케네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기 바랍니다.”

  박성광 씨가 케네디의 연설을 비튼 것이 맞다면 오히려 그 때문에 케네디의 논리로부터 반박당할 수도 있다. “그럼 당신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이신우 칼럼, 자유국가 시민이라면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 밀턴 프리드먼 교수


  물론 케네디가 무조건 진리라고 편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석학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다. 그에 따르면 애국은 한마디로 위선이다. 자유국가의 시민이라면 국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묻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개인의 효용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헬조선’을 외치는 자유 국가의 젊은이들에게 프리드먼의 논리를 적용해 볼까? 이제부터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럴 배짱이 있다면 결코 헬조선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신우 칼럼, 전 세계 인구의 70%가 빈곤층, 이들에게 헬조선은 배부른 소리


  지구 상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이 전 세계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들에겐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 15∼29세 청년 대졸자 4명 중 1명이 니트(NEET)족이라는 통계가 얼마 전에 발표됐다. 니트족이란 고용된 상태가 아니면서 공식적인 교육·훈련도 받지 않는 청년 무직자를 뜻한다. 한국에는 특히 고학력 니트족이 많다고 한다. 2012년 기준 대졸자 니트족 비중이 2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에 달한다.

  고학력 청년들이 실업 상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취업 준비 기간을 늘려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취업 상담을 하는 업체들에 따르면 이들은 작은 회사에는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방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 덕분에 우리나라에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이 200만 원이나 된다. 200만 원∼300만 원 사이도 전체의 34.1%를 차지한다.


이신우 칼럼, 불평과 불만이 앞선다면 헬조선을 벗어날 수 없다


  능력보다 불평·불만이 앞서는 한 ‘헬조선’은 커녕 ‘헬지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미안하지만 박노자 교수조차 헬조선을 외치는 불평분자들과는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에 나가 실력에 따라 차등 대접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일 동등한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학창시절 피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 눈앞의 쾌락을 절제하고 희생해가면서 도서관에서 청춘을 보내던 친구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누군가가 말했다. 노력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듯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임용한의 ‘한국고대전쟁사’ 신라 편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지옥 같았던 삼국 통일 과정을 끝낸 신라와 수도 서라벌에는 풍요와 안락이 찾아왔다. 당나라와 아랍, 일본에서 서라벌로 온 상인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거리를 배회하며 최고의 찬사를 되풀이했다… 풍족함에 어울리지 않게 불평과 욕구불만은 더 커졌다. 그중에는 옳은 말도 있지만, 책임의식은 실종됐다. 관청이고 군대고 불만에 찬 젊은이들의 동창회가 되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문제를 지적하고 불평을 토로하지만, 아무도 힘든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신우 서울경제 논설실장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