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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오형규 칼럼] 설문조사에 무슨 죄가 있나

오형규 칼럼_설문조사에 무슨 죄가 있나


설문조사에 무슨 죄가 있나

-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최근 법무부의 사법시험 폐지 4년 유예 방침이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무부가 하루 만에 최종 입장이 아니라고 발을 뺐지만, 후폭풍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법무부가 사시 폐지 유예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 국민 85%가 사법시험 존치에 찬성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다. 전문 조사기관(리서치앤리서치)이 지난 9월 일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유·무선 전화로 조사했다고 한다. 여기서 무작위로 추출했다는 1,000명의 대표성이나 표본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사법시험 존치냐, 폐지냐를 묻는 설문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는 점이다. 먼저 법무부 12월 3일 보도자료 내용을 확인해보자(밑줄과 굵은 활자는 보도자료 원문 그대로임).


사법오형규 칼럼_시험 폐지에 대한 설문조사, 법무부 보도자료

 

  이런 설문조사 전화를 받았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2번 문항을 보면 ‘누구에게나 응시 기회’, ‘수십 년간(…) 공정한 운영’, ‘객관적 기준’ 등 긍정적 표현들로 사시 존치론을 묘사하고 있다. 반면 1번 문항의 사법시험 폐지론은 ‘법조인이 이원화·계층화’, ‘당시 사회적 합의와 현행법대로’ 등 추상적인 표현들이다. 그간의 경과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설문은 사시 존치 쪽으로 답변을 몰고 가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3번 문항은 더 노골적이다. ‘충분한 논의 없이 결정’, ‘로스쿨 운영성과가 불확실’ 등 사시 존치론의 타당성을 설득하는 의도마저 풍긴다.


오형규 칼럼_ 질문 자체가 답을 암시하는 불량 설문조사의 전형


  과연 전문기관이 실시한 조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시 존치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정부 부처가 일방적인 설문조사를 벌이고도 국민 의견을 수렴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는 질문 자체에 답을 암시하는 불량 설문조사의 전형이다. 더 놀라운 점은 “80% 이상 동의했으니 사실상 국민적 합의”라는 주장을 펴는 전문가들까지 있다는 것이다.



오형규 칼럼_ 복면금지법 설문조사도 표현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


  사회적 이슈마다 쏟아지는 설문조사 가운데도 불량품이 적지 않다. 심지어 같은 사안을 놓고 정반대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를 접하는 일반 국민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 최근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복면금지법의 경우 한국갤럽 조사에서 찬성 60%, 반대 32%인 반면,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찬성 40.8%, 반대 54.6%였다. 설문 내용에 ‘폭행 폭력 등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집회나 시위’(한국갤럽)라고 특정해 물었는가, 아니면 '일각에서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리얼미터)라고 단서를 달아 물었는가의 차이였다. 이는 낙태 여론조사에서 ‘태아의 생명’을 강조할 때와, ‘산모의 건강’을 강조할 때 각기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형규 칼럼_의도적인 표본 샘플링의 오류를 범하기도


  또 다른 왜곡 방식은 의도적인 표본 샘플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원하는 답이 나오도록 일부 특정집단을 표본으로 삼고 전체 의견인 것처럼 과대 포장한다. 경남 합천군의 ‘새천년 생명의 숲’이 2007년 이곳 출신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따 일해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과정이 그런 사례다. 합천군이 공원명칭 변경을 위해 군민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여러 후보 명칭 가운데 ‘일해’가 51.1%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응답자를 보니 대부분 지방의원, 새마을지도자, 마을이장 등 군(郡)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람들이었다. 설문조사를 접할 때는 먼저 응답자 표본의 특성부터 따져봐야 한다.


오형규 칼럼_논란이 끊이질 않는 설문조사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을 둘러싼 역명 갈등에도 설문조사가 끼어 있다. 강남구청이 주민설문 결과(봉은사역 60%, 코엑스역 35%)를 반영해 ‘봉은사(코엑스)역’으로 병기해줄 것을 요청했고 서울시지명위원회가 봉은사역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선 봉은사의 홈페이지에서 곧바로 강남구청의 인터넷 설문조사로 접속되도록 링크시켰다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주민 설문에 특정 집단의 의사가 과잉 반영됐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강남구청이 주민 설문조사를 다시 실시할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결과가 뒤집히면 불교계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역명을 그대로 둬도 말썽, 바꿔도 말썽이 될 판이다.


  일반인은 잘 모르는 전문적인 내용을 설문조사한 뒤 자신들의 주장 근거로 제시하는 경우에도 악용 여지가 많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이끌어내려는 이익집단들이 자주 써먹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에는 전체 응답 중 ‘모름, 무응답’ 비율이 중요한 체크포인트다. ‘모름, 무응답’이 30%를 넘는 설문조사는 아예 무시하는 편이 낫다. 또한, 표본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도 의도에 맞으면 부풀려질 때가 있다. 보건복지부는 담뱃값 인상 6개월 뒤 금연효과를 내놓으면서 지난 1년간 성인남성 흡연율이 5.8%포인트 낮아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남성응답자 1,262명 중 1년 사이 담배를 끊었다는 78명의 응답을 근거로 한 것이다. 게다가 담뱃값 인상 전에 금연한 사람까지 포함돼 있어 금연효과를 과장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오형규 칼럼_왜곡된 숫자로 만든 정책은 위험하다


  이쯤 되면 설문조사를 보면 무조건 의심부터 해야 할 정도다. 숫자가 빠진 정책은 허술하고 잘 와 닿지도 않지만 왜곡된 숫자로 만든 정책은 위험하다. 그러나 통계나 설문조사에는 죄가 없다. 입맛대로 조작하고 포장하고 호도하는 이용자들이 문제일 뿐이다.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숫자에 악역을 떠넘기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 집단일수록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오형규 칼럼_숫자에 현혹되지 않을 매의 눈이 필요한 시대


  사실에 대한 왜곡, 오도를 감시해야 할 언론들도 종종 편향에 좌우된다. 법무부가 사시 폐지 유예를 발표한 당일에 설문조사의 문제점을 비판한 언론은 없었다. 보도자료대로 ‘국민 85%가 사시 존치에 찬성’이라는 식이란 보도만 나왔다. 하루 이틀 지나서야 일부 언론에서 설문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못 본 것일까, 안 본 것일까. 혹여 자신의 주장에 부합되는 증거는 채택하고, 반대 증거는 기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설문조사와 통계가 넘쳐나는 시대다. 단순한 주장도 숫자가 뒷받침되면 훨씬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숫자에 현혹되지 않을 매의 눈이 필요한 시대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