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미, 아모레, 그리고 우리 대기업의 미래
- 박진용 뉴시스 부국장 겸 경제부장
“숨이 턱까지 찼습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10대 그룹 3세 오너 경영인은 심각했다. “일반인들은 재벌 3세라면 부모 재산 상속해서 편하게 돈 버는 줄 압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솔직히 우리도 ‘뺑이 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계에 와 있다는 느낌입니다. 가격 경쟁력에선 중국에 밀리지, 그렇다고 새로운 기술은 나오지 않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말이 대기업이지, 우리도 중국에 가면 그냥 이름 없는 중소기업일 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국내 대기업 가운데 이른바 요즘 식으로 하면 글로벌 기업, 옛날식으로 하면 다국적 기업(multi-national company)이라고 할 수 있는 데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최근 만난 두 경영인의 말을 길게 인용한 건 ‘샤오미 현상’으로 대표되는 ‘차이나 패닉(Panic)’ 때문만이 아니다. 중국 업체들이 조선, 철강, 해운, 석유화학, 전자 등 전통 제조업 분야뿐 아니라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분야까지 우리를 턱밑까지 추격했고, 이제 뛰어넘으려 한다는 건 더이상 뉴스도 아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30대 대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지난달 나온 자료에 있었다.
얼핏 삼성·현대차로의 쏠림 현상이 심화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나머지 그룹들의 경영 실적이 너무 부진했다는 게 실상에 가깝다. 삼성·현대차의 당기순이익도 역시 2010년 38조 원에서 작년 33조 6,000억 원으로 11.5%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현대차를 뺀 나머지 28개 그룹의 당기순이익은 같은 기간 42조 1,000억 원에서 7조 9,000억 원으로 무려 81%나 감소했다.
세계 경제의 장기침체 속에서 삼성·현대차 두 그룹은 그래도 선전한 반면 여타 기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30대 거인 가운데 두 명 만 남고, 나머지는 난쟁이로 전락해 버린 꼴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런대로 잘 버티던 국내 대기업은 2012년 이후 두드러진 실적 부진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 경제 침체에 더해 엔화(貨) 약세에 힘입은 일본 기업들의 부활과 중국 기업들의 추격으로 기업 환경이 크게 악화된 탓이다.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3년을 버틸 것인가'가 최대 화두가 된 형국이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1997년 IMF 이후처럼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이 쓰러질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팽배하다. 한마디로 지난 50년간 한국을 먹여 살려온 제조업이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는 느낌이다.
삼성이나 현대차도 절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신생 중국업체 샤오미에게 1위 자리를 빼앗기더니, 며칠 전 나온 실적에선 올 1분기에 무려 4위로 밀려났다.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 S6를 앞세웠는데도 이 지경이다. 여기에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저로 다시 힘을 얻은 일본 업체들의 부활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달부터 현대차를 비롯해 국내 자동차 업계의 수출은 물량 측면에서도 줄고 있다.
사실 한·중·일 3국은 그동안 자연스럽게 3각 분업구조를 형성해 왔다. 일본이 부품·소재·장비 중심의 고급 기술, 한국은 완제품 위주의 고급·중급 기술, 중국은 저급 기술 및 제품에 각각 특화했다. 완제품만큼은 대부분의 업종에서 한국이 최고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분업구조가 깨지면서 최근 3국 간, 특히 한중 양국 간 제조업 전반에 걸쳐 전면전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의 캐치업(catch up) 전략에서 탈피해 시장 선도자(first mover)가 돼야 한다’거나 ‘기존 제조업에서 벗어나 사물인터넷과 웨어러블, 환경과 바이오 등 신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편에선 제조업 주도권이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이동했듯, 결국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다분하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이른바 재벌로 불리던 기업들 상당수가 난쟁이처럼 쪼그라들고 있지만, 지난 50년간 축적해온 우리의 저력을 스스로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다. 먼저 중국의 도전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사실 제조업은 조립→부품→소재 순으로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 조립·완제품 분야는 머지않아 중국에 자리를 내주겠지만, 지난 50년간 쌓아온 제조업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 못지않게 부품·소재 부문에서 우위를 점한다면 앞으로 10~20년을 중국과 경쟁해볼 만하다. 제조업을 혁신할 경우 결코 미래가 비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희망은 또 있다. 삼성전자를 넘어 주식시장의 새로운 황제주로 등극한 아모레퍼시픽이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내수용 화장품 기업에서 중국 시장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공략해 지금은 시가총액 규모로 글로벌 4대 화장품 업체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증권·패션 사업과 스포츠구단을 정리하고 199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화장품 사업에만 올인한 덕분이다. 경쟁력 있는 사업을 선택해 집중한 것이다. 1954년 화장품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둔 아모레의 상표권은 지금 9,354건으로 국내 1위다. 한방 브랜드 '설화수'는 명품으로 통해 중국 관광객(유커)의 단골 쇼핑 폼목에 올라 있다. 아모레퍼시픽이 개발한 히트 화장품을 세계적인 프랑스 브랜드 랑콤과 크리스챤 디올이 본떠 시판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제는 전문기업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얘기다. 부품·소재든, 소비재든 마찬가지다. 대기업·완성품 생산 중심으로 돼 있는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를 부품·소재 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 간 빅딜을 통한 사업재편이 필수적이다. 실제 지난해 말 삼성은 한화에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삼성탈레스, 삼성토탈 등의 경영권을 넘기는 빅딜을 했다. 삼성 관련사 노조들의 반대로 지금까지 진행은 지지부진하지만,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해야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삼성마저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나려면 핵심사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판에 나머지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재계 인사는 요즘 국내 M&A는 “한쪽이 망했거나, 3세에게 기업을 떼서 물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일어난다”고 촌평했지만, 동기가 무엇이든, 전문기업으로 큰 방향을 틀어야 한다.
아모레는 그 길을 먼저 보여줬다. 브랜드 인지도 강화와 제품 고급화의 길이다. 이와 함께 부품·소재의 프리미엄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때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히타치·도시바·NEC·파나소닉 등은 위기 이후 사업 구조 재편을 통해 부품·소재에서 뒤늦게나마 새 길을 찾은 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삼성이나 현대차도 완성품뿐 아니라 부품·소재의 프리미엄 전략으로 신규 수요 확보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다른 대기업들도 분야별로 특화된 전문 기업을 통해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거인으로 거듭나야 한국 경제에 희망이 있다. 정부가 기업들의 사업재편을 적극 도울 '사업재편지원특별법’, 일명 ‘원샷법'을 조속히 마련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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