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페이, 카카오페이, 그리고 모바일 금융빅뱅
-박진용 한국일보 논설위원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장관들에게 금융시장의 ‘파생상품(derivatives)’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글로벌 금융위기로 월가 전체가 곧 무너질 것 같았던 2008년 미 월간지 <애틀랜틱(The Atlantic) 12월호>는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를 하나 실었다. 인터뷰 상대는 자본금 2,00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운영 중인 중국투자유한책임공사(CIC) 가오시칭(高西慶)사장이었다. 미국의 최대 채권국으로 당시 2조 달러의 외환 보유고를 쌓아놓고 있던 중국의 나랏돈을 굴리는 책임자였다.
강연 중인 중국투자유한책임공사(CIC) 가오시칭 사장(출처:듀크대 홈페이지)
가오 사장은 1999년 국무원(우리의 정부에 해당)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고민에 빠졌던 이야기부터 털어 놓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조심스럽게 금융시장을 육성해 오던 주룽지 총리를 비롯한 당시 중국 지도부가 ‘자본시장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특별 강연을 요청해 왔는데, 금융시장에 까막눈인 장관들을 상대로 어느 것 하나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재미 있는 비유법을 쓰기로 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이른바 ‘거울 모델(the model of mirrors)’.
“우선 여기에 두툼한 책 한 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저자의 피와 땀이 서린 책의 가치가 100위안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 말합니다. ‘책 자체를 그 값에 직접 팔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거울을 하나 갖고 있는데 책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 이미지를 팔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게 주권(株券ㆍ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권리증서. stock certificate)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저도 또 하나의 거울을 갖고 있어 그 거울의 거울 이미지를 팔 수 있습니다.’ 그게 파생상품(Derivativesㆍ 주식과 채권 같은 금융상품을 기초로 새로운 현금 흐름을 가져다주는 증권)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근데 여러분이 1만 개의 거울을 갖고 있으며, 그 각각의 거울 이미지가 거의 완벽합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이들 거울들이 거의 실제의 책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거울 이미지가 방해를 받게 되고, 나머지 거울도 모두 똑같이 그렇게 돼 버립니다.”
강의를 듣던 중국의 각부 장관들은 일제히 실소를 터트리더니 반문했다. “어떻게 거울의 이미지를 팔 수 있는 것이요? 거기에 어떤 왜곡(Distortion)이 전혀 있을 수는 없는 거요?” 당시 가오 사장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이들 파생상품 하나하나를 보면 정말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집합적으로 놓고 보면 그 것들은 말도 안 되는 난센스입니다.” 당시 그가 인터뷰에서 10년 전의 ‘거울 왜곡’ 에피소드를 꺼낸 건 파생상품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이고, 이것이 미국 경제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통렬히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가오 사장의 일화를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와는 다르다. 파생 금융상품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더 주목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불과 15년 전만 해도 중국 정부의 리더들 대부분은 자본시장과 금융상품에 대한 기초지식조차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난 15년간, 아니 최근에 중국 금융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소재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중국은 자본 유ㆍ출입 통제 완화 등 금융시장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에 비해 금융 분야가 한참 뒤쳐져 있는 게 현실이다. 제조업에서는 세계의 공장이 됐지만, 금융분야는 아직도 후진적이라는 게 중국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자 착각이다. 최근 IT와 금융의 결합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모바일 금융빅뱅의 흐름에서 보면 오히려 미국을 뺨칠 정도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요즘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게 ‘알리페이, 애플페이, 카카오페이 등 이른바 ‘간편결제’로 불리는 모바일 금융결제시스템이다. 현금과 신용카드를 쓰던 사용자들이 상품 검색부터 결제까지 모든 것을 스마트폰 하나로 손쉽게 해결하기 원하기 때문에 급팽창하고 있는 시장이다. 이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가장 앞선 축에 속한다. 중국의 알리페이(Alipayㆍ즈푸바오ㆍ支付寶))는 간편결제시스템으로 미국의 페이팔과 함께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다. 놀라운 건 이 업체가 단순히 결제서비스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6월 말 중국 금융시장의 5대 플레이어인 국유은행(공상ㆍ중국ㆍ농업ㆍ건설ㆍ교통은행)들에 초비상이 걸렸다. 중국 전체 금융자산의 44.90%, 은행 예금의 69.04%를 이들 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아마존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기업으로 부상한 알리바바가 온라인 금융상품인 ‘위어바오(餘額寶•Yuebao)’를 내놓은 것이다. 머니마켓펀드(MMF)인 이 상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불과 1년 만에 9,000여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 단숨에 5,740억 위안(약 98조 원)의 시중 자금을 빨아들였다. 엄청난 성공의 비결은 금리에 있었다. 연 3%대 초반인 은행 예금 금리의 두 배에 달하는 연 6%대의 금리를 제시한 덕분이었다. 국유 상업은행이 금융 당국의 수신금리 제한을 받지만 민간기업인 알리바바는 자체적으로 금리 책정을 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모바일 결제시스템 알리페이 결제창(출처:박진용 논설위원)
하지만 상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위어바오의 돌풍이 금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 게 된다. 그 배경에는 알리페이가 있다. 알리페이는 알리바바가 2004년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미국 이베이를 벤치마킹해 구축한 전자결제시스템이다. 알리바바의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타오바오’에서 물품 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사용한다. 온라인 결제는 물론이고 모바일 앱을 통해 교통요금, 공공요금, 오프라인 쇼핑 등 거의 모든 결제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가입자 수 8억 명, 거래 대금은 450조 원에 달했다. 이들 고객은 알리페이에 충전된 금액으로 온ㆍ오프라인 쇼핑을 즐기고, 이때 남은 금액이나 새로 충전한 금액을 ‘위어바오’로 이체하면 시중은행보다 2배가량 높은 이자도 챙길 수 있게 된다. 온라인 쇼핑-모바일 결제-온라인 금융상품을 굴비처럼 한데 엮어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알리바바는 중국 중소 상공인들에게 '알리파이낸스'란 소액 대출 서비스도 하고 있는데, 40만 개 기업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부실채권 비율은 0.06%로 기존 은행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한다. 기업간(B2B) 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닷컴에서 그간 축적한 거래 데이터와 고객 평가 등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첨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떤 IT기업 가운데 아직 이런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없다.
알리바바의 금융업 진출과 알리페이의 급부상은 이 회사 오너인 마윈 회장의 통찰력과 결단력 덕분이겠지만, 중국 당국의 강력한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중국 정부는 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그림자 금융의 폐해를 차단하고, 금융시장 선진화를 꾀하기 위해 인터넷 기업들의 금융권 진출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지난 2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총리는 “인터넷 금융을 더욱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3월 발표된 10개 민영은행 시범 사업자에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포함됐다. 알리바바로선 정부로부터 은행업 허가까지 받아 온라인 송금과 결제기능은 물론이고, 수신과 여신기능까지 두루 갖추게 된 셈이다. 한국으로 치면 네이버나 다음에게 은행 진출을 허용해 준 격이다.
(출처:박진용 논설위원)
이쯤에서 한국 상황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최근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명동으로 건너가는 지하도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계단 양쪽 벽면에 ‘알리페이’의 광고 문구가 빼곡히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올 4월 한국지사를 설립한 알리바바가 알리페이의 국내 서비스를 본격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광고부터 하고 있었다. 알리바바는 최근 미국 소매업자들을 위한 서비스 ‘이패스(ePass)’를 내놓고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5억 명의 중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알리바바를 통해 온라인으로 편리하게 장사를 하라”는 제안을 뿌리칠 기업들이 얼마나 될까. 한국 중소 상공인들이나 유통업자들에게 똑같은 비즈니스를 제안하며 국내 시장 장악을 노릴 것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사실 IT와 금융의 융ㆍ복합 서비스라면 IT 강국 한국이 가장 앞서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미국은 물론 중국에 비해서도 걸음마 수준이다. 온라인과 모바일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각종 규제에 묶여 공인인증서, 안전결제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금융결제시스템은 불편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또 금융업법과 여신전문업법 등 각종 규제를 통과해야 하고, 엄격한 자본관리 규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IT 기업들이 새로운 금융 수익 모델을 개발해 금융서비스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식, 최근 ‘천송이 코트’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결제 시 공인인증서 사용의무를 폐지했다. 또 이달 초엔 금융과 IT의 융합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와 금융기관, IT 업계가 참여하는 IT•금융 융합 민간 협력체를 구성, 운영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다음카카오는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 ‘카카오페이’를 출시한 데 이어 다음 달엔 모바일 송금 서비스 ‘뱅크월렛카카오’를 선보인다. 삼성전자도 조만간 모바일 송금 서비스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국내 모바일 결제시스템 카카오페이(출처:카카오페이 홈페이지)
지금 IT와 금융의 결합을 통한 모바일 금융빅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금융(finance)과 기술 (Technology)을 결합한 합성어로 핀테크(FinTech)라는 말도 등장했다. 미국의 경우 2020년에 기존 은행권 시장의 30%를 IT 기업 등 비금융사가 잠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구글과 애플도 금융업에 진출하고 있다. 이런 융ㆍ복합화 흐름에서 뒤처지면 머지않아 우리 국민들은 중국 알리페이 결제시스템을 통해 쇼핑하고 여행하고 생활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면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나아간다면 수십 년간 제자리걸음을 해온 우리 금융산업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모바일 금융빅뱅 트렌드를 타고 거침없이 진군해 오는 알리페이에 맞설 토종 기업들을 육성하면서 새로운 금융산업을 일으켜야 한다. 신규진입을 저해하는 금융 관련 각종 법률과 제도를 철폐하고, 사전 규제보다는 사후규제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급변하는 시장 상황을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규제 당국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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