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칼럼] 4차 산업혁명, 지리를 아는 리더라야 길을 안다
4차 산업혁명, 지리를 아는 리더라야 길을 안다
-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리를 모르는 리더는 모르는 길을 걷는 장님과 같다. 헨리 키신저는 회고록 『재생의 시기』에서 닉슨 대통령의 지리학적 무지를 꼬집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열대 섬나라 모리셔스는 강수량 많고, 농업이 번성했으며 미국의 우방이다. 그 총리가 백악관을 찾았다. 그런데 담당자가 모리셔스를 중동의 모리타니와 혼동했다. 모리타니는 서아프리카의 사막 국가로 중동 전쟁 이후 미국과 단교했다. 닉슨은 모리셔스 총리에게 '외교를 회복할 때가 됐다. 그러면 원조와 농사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총리는 어안이 벙벙, 다른 화제를 꺼냈다. 닉슨에게 자기네 섬에 미국이 설치한 우주 추적 기지 운영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닉슨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급히 메모지에 뭔가를 써 (당시 국무장관인) 내게 내밀었다. '우리와 외교 관계도 없는 나라에 왜 미국의 우주 추적 기지가 있는 거요?’”
세계는 지금 지도 전쟁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구글의 한국 지도 반출 요청을 놓고 관련 업계와 정부 부처가 찬반논란으로 뜨겁다. 구글이 탐내는 건 단순한 지도가 아니다. 초정밀 지리정보시스템(GIS) 데이터다. 국토지리원은 2001년 축척 5,000대 1의 초정밀 지도를 디지털화했다. 작업 시간 9년, 예산만 줄잡아 1,300억 원이 들었다. 여기에 건물·지하철·하수관·교통량 등의 정보를 추가하면 초정밀 GIS 데이터를 만들 수 있다. 구글은 누구보다 GIS 데이터의 가치를 잘 안다. 지리 정보야말로 구글 생태계의 뿌리다. 닌텐도의 ‘포켓몬 GO’나 차량 공유업체 우버의 성공신화가 구글 생태계에서 나왔다. 구글은 개인에겐 지리 정보를 무료 개방하지만 기업에는 돈을 받는다. 우버가 얼마 전 지도 독립을 선언한 이유다. 직접 만든 지리 정보를 손에 쥐지 않으면 영원히 구글 생태계에 종속될 것이란 위기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구글은 집요하다. 8년 전 허가 권한을 쥔 국토지리정보원에 데이터 반출을 처음 신청했다. 지리정보원은 '국가 안보상 이유'로 불허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구글은 2011년엔 도로명 새주소 관련 지도 데이터 반출을 행정안전부에 요청했다. 역시 거절당했다. 그런다고 물러날 구글이 아니다. 지난 6월에 다시 국토교통부에 데이터 반출을 요청했다. 정부는 8개 부처 협의체를 꾸렸다. 지난달 22일 1차 협의를 했다. 국방부·국가정보원·통일부·행정자치부 등은 반대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가 이유다.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미래창조과학부는 외교·관광·산업에 도움이 된다며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 결과는 어떨까. 국토지리원 관계자는 “안보 쪽 위협은 분명한데 산업 쪽 이득은 분명하지 않다”는 말로 에둘러 말했다. 불허 쪽에 무게추가 실렸다는 얘기다.
구글의 지도 반출 이슈는 세금 논쟁, 규제 완화 논쟁, 개인 정보 유출 문제 등 더 복잡한 이슈를 안고 있다. “구글의 국내 세금 회피를 막는 게 우선이다.” “아니다. 그것보다 규제를 풀어 4차 산업혁명의 토양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런 류의 반론·재반론은 다 이유가 있다. 논란은 어쨌든 멀지 않은 장래에 상황과 현실에 맞춰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지도 전쟁의 진짜 본질의 문제는 우리 리더들이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은 지도 전쟁을 놓고 '역차별'을 말했다. 구글의 지도 반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중앙일보에 실은 칼럼에서 그 말에 울컥했다고 썼다. 그 말이 맞다. 오죽 기업하기 힘든 나라면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사실을 말하자면 울컥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거꾸로 네이버가 구글이고 한국이 미국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이버에 지도 데이터 반출을 허용할까 말까를 놓고 정부 부처가 머리를 맞대고 우왕좌왕, 좌고우면하는 미국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생각은 꼬리를 문다. 이번엔 안타까움이다. 한국의 경제 리더 수준이 이 정도인가. “구글과 한 판 싸우자, 지금은 구글의 시대지만 미래는 우리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도는 내줘도 좋다. 다만 지도로 만들 세상,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세상은 우리가 지배할 것이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자신감이요, 당당한 리더십이었다. 지도 전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생각의 숙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줄 것이다. 생각이 짧으면 행동도 짧다. 큰 생각으로 만들 큰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는 리더가 보고 싶다. 미치도록.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