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대한민국이 '자영업의 무덤'이 된 이유
대한민국이 '자영업의 무덤'이 된 이유
-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자영업자의 ‘무덤’이다. 경제규모에 비해 이례적일 만큼 자영업자가 많지만, 그 대부분이 몇 년도 못 버틴다. 많이 생기고 빨리 죽는다.
우리나라의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중이 23.2%에 달한다. 그리스(31.8%)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그리스는 해운과 관광 외엔 변변한 산업이 없는 나라다. 제조업 강국임을 자부하는 우리가 그리스와 1, 2위를 겨루다니 기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직장에서 밀려난 중장년층이 호구지책을 위해 너도나도 식당, 치킨집이며 편의점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자영업자의 평균수명은 3.7년에 불과하다. 음식업은 3.3년, 편의점이나 세탁소 같은 서비스업은 2.8년밖에 되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 집 걸러 나타나는 커피 전문점은 고작 1.5년에 지나지 않는다.
경쟁이 치열하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것이다. 직장인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는데 일자리가 줄어드는데 따른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런데 그것만일까. 나는 자영업자 쪽의 문제도 크다고 생각한다. 예외도 있겠지만, 많은 자영업자의 경우 프로 정신이 약하거나 왜 장사를 하는지의 철학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 없이 오로지 돈벌이만을 위해 장사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설 연휴 근무 때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광화문 시내의 음식점들은 대개 문을 닫았지만, 언제까지 휴업하고 언제부터 다시 문을 여는지 안내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아무런 설명도 안내문도 없이 그냥 불이 꺼져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길에는 영업 중이라는 입간판을 그대로 놓아둔 채 문을 닫아건 곳도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중요한 얘기다. 음식점은 단골손님 장사다. 고객으로선 애써서 단골식당을 찾아 왔는데 아무 안내도 없다면 무성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고객을 왕으로 생각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다. 프로라고 할 수 없다.
음식점의 불쾌한 경험담이라면 누구에게나 한두 개는 다 있을 것이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와도, 음식 국물이 튀어도 주인이 태연한 나라는 선진국에서 우리뿐이다. 만약 일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음식점은 당장 문을 닫았을 것이다.
몇 달 전 도쿄에 출장 갔을 때 ‘이치란’이라는 유명 라멘집에 들른 일이 있다. 라멘 맛도 좋았지만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한 프로 정신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라멘집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주문표를 준다. 취향에 따라 국물의 농도를 진하게 할 건지 연하게 할 건지, 면의 강도는 어느 정도를 원하는지, 양념과 파, 마늘을 어느 정도 얹을 것인지 등등을 표시하라는 것이다.
항목별로 3~5단계로 분류된 조합을 다 합치면 무려 2,250가지의 맛의 가짓수가 나온다. 이렇게 세분화된 수준까지 손님의 다양한 취향을 다 맞춰 주겠다는 것이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감동부터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니 1시간을 줄 서서 기다려도 고객들이 불평하지 않는다.
작년 연말엔 도쿄 외곽의 한 허름한 라멘집이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을 받아 화제가 됐다. 라멘 가게로선 첫 등재였다. 좌석 9개뿐인 이 라멘집을 운영하는 것은 고졸 출신의 37세 전직 샐러리맨이다. 그는 의류회사에 다니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를 차렸다. ‘생애 라멘과의 단판 승부’라는 블로그를 운영할 정도로 라멘 만들기에 인생을 걸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멘에 관한 한 최고가 되겠다는 프로 정신이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이라고 모든 식당 주인이나 자영업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자영업자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생존율을 보이고 있다. 돈 벌기 자체가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장인(匠人) 정신을 갖고 뛰어들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생명을 건다는 이른바 ‘잇쇼켄메이(一生懸命)’ 정신이다.
생계가 막막해 장사를 시작한 이 땅의 자영업자들의 땀과 눈물을 매도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얼마나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했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장사판에 뛰어들겠는가. 은퇴자를 치킨집과 편의점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의 일자리 체제와 경력관리 시스템은 구조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영업이 은퇴자의 무덤이 되지 않기 위해선 자영업자들도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철저한 프로 정신으로 치열하게 연구하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몸을 던지지 않으면 마(魔)의 벽이라는 3년 생존선을 넘기 힘들다. 그렇게 진정한 프로가 돼야 돈도 따라온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