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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칼럼] '파리 협정'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FKI자유광장 2015. 12. 21. 15:59



'파리 협정'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 이정재 중앙일보 논설위원


  2015년 12월 12일(현지시각) 파리는 인류사의 새 장을 여는 무대였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된 제21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의 대장정이 마침내 마무리됐다. 오후 7시 30분 총회 의장인 로랑 파비위스 프랑스 외무장관이 “파리 기후협정이 채택됐다”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총회장은 금세 박수와 환호에 싸였다. 파비위스 장관은 다시 의사봉을 흔들며 “작은 망치가 큰일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환호가 일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포옹을 나눴다. 연단 아래에선 ‘기후변화 전도사’인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환하게 웃었다. 참가자들은 "역사적 협정"이라며 자축했다. 일부 외신은 "인류가 화석시대의 (점진적) 종언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새로운 유엔(UN)기후변화협약, '파리 협정'은 지구촌이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에 들어선다는 의미다. 2020년부터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해야 한다. 산업화 이전에 비해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2도 훨씬 아래(well below 2℃)'로 묶기로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온상승을 1.5도로 억제하는 노력도 병행하기로 했다. 38개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을 의무화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모든 나라가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5년마다 감축목표를 정하고 이행상황을 점검한다. 선진국들은 연간 1,000억 달러 이상을 개도국에 지원하기로 했다. 미국이 반대했지만, 프랑스가 밀어붙였다.



  '파리 협정' 타결은 기후변화를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가 1997년의 교토의정서 때와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변했다. 미국은 2001년 교토의정서를 탈퇴할 만큼 기후변화협약에 부정적이었다. 공화당은 지금까지 화석연료 제한을 반대한다. 그랬던 미국이 바뀌기 시작한 건 오바마 행정부 출범부터다. 결정적 계기는 2009년 셰일가스 혁명이 제공했다. 그해 상업생산에 성공한 셰일가스 혁명으로 2008년 49%에 달했던 미국 발전분야의 석탄 사용 비중은 2012년 37%로 감소했다. 온실가스 배출도 2012년엔 전년보다 3.8% 줄었다. 미국으로선 자신감을 가질만했다. 오일 중심의 세계 에너지 시장·안보 구조를 확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오일은 지정학적·정치적이다. 미국으로서도 더이상 집착할 이유가 없다. 신 기후체제를 빌면 오일 중심의 에너지 안보구조를 바꿀 수 있다. 이게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 어디 그뿐이랴. 잘만 활용하면 무섭게 추격해오는 중국·인도의 발목을 몇 년, 몇십 년 잡아놓을 수도 있다.

  중국도 입장이 바뀌었다. 여러모로 힘이 달렸던 교토 때와 달리 지금은 미국과 G2로 대접해달라며 우기는 중이다. 군사·정치·경제 모든 분야에서 '유이(唯二) 대국' 을 자칭한다. 그런 이유를 들어 위안화를 국제통화기금(IMF)의 통화 바스켓에도 욱여넣었다. 미국 중심의 세계은행에 맞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만들었다. 그런 중국이 신 기후체제에서만은 개도국이라며 혼자 발을 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베이징 하늘을 뒤덮는 시커먼 미세먼지가 중국 내 환경론자들의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 주최국 프랑스의 억척스러운 노력이 합해져 역사적 협정이 탄생할 수 있었다.



  파리 협정은 우리에게도 발등의 불이다. 한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배출전망치(BAU) 대비 37%를 줄이겠다는 자발적 감축안을 유엔에 제출해놓고 있다. 제조업 비중이 크고 에너지 효율도 뛰어난 산업구조를 갖춘 우리에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7위에 경제규모 세계 15위인 한국이 이제 와서 목표를 줄이거나 못한다고 할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 기조연설에서 "2030년까지 에너지 신산업을 100조 원 규모로 키우고 일자리 5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밝혔다. 신재생에너지, 태양광, 에너지 저장과 효율화 부분에선 한국이 강점이 있다. 신 기후체제 출범으로 이런 분야에서 당장 연간 1,800조 원(세계 총생산의 약 2%)의 새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이 시장을 선점해 한국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산업계에서는 '제조업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우려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왕 해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게 옳다. 여건도 교토의정서 때와는 달리 많이 좋아졌다. 우선 우리 기업에만 채워지는 족쇄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기업이 같은 족쇄를 달고 뛰어야 한다.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가 좀 더 힘들 수는 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요 몇 년 새 에너지 소비도 줄고 있다.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정도다. 2013년 약 7억 톤을 정점으로 우리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현상 유지 또는 후퇴하는 단계다. 감축 목표 가운데 3분의 1은 해외에서 사 오기로 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제도적 기반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이번 파리 협정으로 곧 중국이 배출권 거래 시장에 뛰어들 것이다. 우리는 올 초부터 배출권 거래시장을 운용 중이지만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 시늉하기란 지적까지 나올 정도다. 국내 시장을 서둘러 활성화해야 국제 배출권 거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이참에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 개편도 서둘러야 한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중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 진작부터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우리 경제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파리 협정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의 또 다른 이름은 기회다.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