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스토리/칼럼노트

[정필모 칼럼] 석유의 정치경제학 : 저유가는 누구를 노리나?

FKI자유광장 2015. 3. 6. 10:00


  국제 유가는 매우 복잡한 정치경제적 역학의 산물이다. 국제 유가의 움직임을 보면, 경기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동시에 그 이면을 뜯어보면, 국제 정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다른 원자재가 대부분 그렇듯이 석유도 금융상품의 하나가 됐다. 그런 만큼 최근 국제 유가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이와 관련된 변수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저유가의 경제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상식적인 얘기지만, 저유가는 공급 과잉, 수요 부족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공급 과잉은 주로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 증가에서 비롯됐다. 2008년만 해도 하루 평균 500만 배럴에도 못 미치던 미국의 전체 원유 생산량은 2013년 670만 배럴로 늘어났다. 셰일로부터 추출한 타이트 오일(tight oil)과 천연가스 생산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같은 기간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량은 거의 6배로 급증했다. 미국 에너지 정보국(EIA)은 이런 추세라면, 미국이 2020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2030년에는 원유를 순(純)수출하는 에너지 자립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1> 미국은 일부 언론이 ‘사우디 아메리카(Saudi America)’라고 부를 정도로 산유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림1>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량이 급증한 것은 채굴 기술과 국제 유가 급등에 기인한 것이다. 미국 원유 생산업체들은 수평 채굴과 수압 파쇄 방식 등의 신기술을 이용해 생산 비용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2009년 100만 BTU에 10달러였던 셰일 오일의 생산 비용이 2012년 3달러 수준까지 내려갔다. 반면 2000년대 후반 국제 원유 가격은 한때 1배럴에 140달러를 웃돌 정도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에 따라 셰일 오일 생산업체들의 채산성이 좋아지고, 생산량은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국제 원유 소비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줄고 있다. 이처럼 공급은 늘어나는 데 비해 수요가 정체돼 있다 보니, 2014년 7월만 해도 1배럴에 100달러를 웃돌던 국제 유가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찬물을 더 끼얹은 것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생산량 유지 결정이다. 2014년 11월 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정례회의는 하루 3,000만 배럴 수준인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기로 했다.


<그림2>


  OPEC의 생산량 유지 결정이 발표된 직후 국제 유가는 곤두박질쳤다. 국제 유가는 1배럴에 70달러대로 떨어졌다. 하루 동안 7% 안팎, 2013년 말에 비해서는 35%가량 하락했다. 이 같은 유가 수준은 2010년 이래 4년 만이었다. 이후에도 국제 유가는 하락세가 이어져 2015년 1월 중순에는 1배럴에 40달러대까지 내려갔다. <그림2> 경기 회복 지연으로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 공급 과잉 해소에 대한 기대감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OPEC은 왜 감산 대신 생산량 유지 결정을 내렸을까? 당시 대다수 언론들은 “석유전쟁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언론 보도대로 라면 그 같은 결정을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석유전쟁의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그럴까,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 회원국들의 의도대로 그들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유가가 손익분기점 아래로 떨어지면, 셰일 오일 생산이 타격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셰일 오일의 세계 최대 생산국인 미국의 석유 생산이 줄어들게 된다. 미국은 대신 석유 수입을 늘리게 될 것이다. 자연히 공급 과잉도 해소돼 유가가 반등할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OPEC이 생산량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배경이다. 그러나 유가 하락으로 수입이 줄어든 이란, 베네수엘라, 이라크, 나이지리아 등 OPEC 회원국들이 재정 압박을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들이 OPEC 회의에서 감산을 요구했던 것도 이런 속사정 때문이다.

  OPEC 회원국은 아니지만, 또 다른 거대 산유국인 러시아의 움직임도 변수다. 사실 유가 하락으로 경제에 가장 많은 타격을 받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석유 생산 원가마저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에 비해 배럴당 10달러 이상 비싸다. 이런 상황에서 OPEC의 생산량 유지 결정은 가뜩이나 어려운 러시아 경제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최근 10여 년 사이 나타난 ‘석유의 금융화(financialization)’도 눈여겨봐야 할 사항이다. 국제 유가는 그것과 연동된 증시의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유가가 떨어지면 펀드의 수익률도 하락하고 환매도 늘어난다. 환매가 늘어나면 투자자에게 돈을 내주기 위해 상장지수펀드에 편입된 주식을 팔아야 한다. 주식 매물이 늘어나니 자연히 주가도 유가와 함께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는 석유가 금융자산의 일부가 됐다는 의미다. 요즘 국제 유가와 주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조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가 하락이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원인은 이른바 ‘오일 머니’의 위축에서 찾을 수 있다. 유가가 떨어지면 산유국들은 수입이 줄어든다. 반면에 경제 사정의 악화로 자금은 더 많이 필요해진다. 이에 따라 산유국들은 해외 증권시장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투자한 돈을 빼내 부족한 재정을 메워야 한다. 이럴 경우 오일 머니가 주로 투자됐던 선진국과 신흥국 증시의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채권 가격 역시 하락 압력을 받아서 채권 금리가 오르게 된다.

  산유국들의 오일 머니 투자 위축은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할 경우 국제금융시장의 유동성 경색을 심화시킬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달러 가치 상승세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최근 유가와 달러 가치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2014년 7월 이후 지난 2월 말까지 국제유가는 50%가량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 세계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지수, 달러 인덱스(dollar index)는 20% 가까이 상승했다. 이 같은 유가 약세, 달러 강세의 지속은 산유국과 신흥국으로부터 자금 이탈을 가속화시켜 외화 유동성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특히 그럴 가능성이 큰 나라는 러시아,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 재정상태가 나쁜 산유국들이다.



  이들 나라에 비해 미국에는 유가 하락이 결코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경기 회복을 가속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국제 유가가 셰일 오일의 생산 원가 이하로 떨어지면, 관련 업체들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미국의 석유산업은 물론 경제 성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 만큼 석유 수입을 늘리더라도 부담은 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반적인 에너지 비용이 낮아지면서 경기 회복이 빨라지고, 셰일 오일 생산 감소에 따른 성장률 하락도 보전될 수 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다. 그러나 이후 소비 증가와 생산 감소로 원유 수입이 급증하면서 OPEC 카르텔에 가격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몇 차례의 오일 쇼크는 세계 최강의 미국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면서 달러 가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미국이 OPEC의 주도권을 쥔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통해 국제 원유 거래에서 그토록 달러를 결제통화로 유지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점점 반전되고 있다. 미국은 셰일 오일을 무기로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하는 최대 산유국의 위치를 되찾아가고 있다. 반면, OPEC 카르텔과 또 다른 산유 대국 러시아의 영향력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그럴수록 미국 경제와 달러 가치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미국 경제와 달러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오일이 이제 정반대인 ‘버팀목’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OPEC의 생산량 유지 결정을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중동의 친미 왕정 국가들이 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이들 나라가 “미국을 겨냥해 석유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언론 보도는 너무 성급하고 빗나간 분석으로 보인다. 유가가 하락하면 먼저 타격을 받는 나라는 이란과 베네수엘라, 러시아, 나이지리아, 이라크 등의 산유국이다. 이 가운데 이란과 베네수엘라, 러시아는 미국과의 관계마저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석유전쟁이 과연 누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