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갑 칼럼] 불통정국,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불통정국,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 정운갑 MBN 수석논설위원(앵커)
지난 15일 전경련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국민들이 현재 우리 경제를 얼마나 위기 국면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응답자 중 93.9%가 체감 경기에 대해 ‘불황’이라고 답했다. 체감물가 상승과 소득 감소를 가장 염려하고 있었다. 설문 조사가 아니더라도 경제 얘기만 하면 한숨부터 나온 지 오래됐다. “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에 앞서 국제통화기금(IMF)은 낮은 출산율, 저조한 내수와 기업의 투자 보류 등으로 경제성장률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난 13일 경고했다. IMF의 해법이 늘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경제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은 국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우리 경제가 위기 속에 있다고 파악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부르짖은 현 경제 문제, 즉 출산율과 복지의 문제, 각 부문의 구조조정, 새로운 성장 동력, 리더십… 이 같은 과제들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을까? 97년 외환위기 때 금융위원장으로 경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연초 “올해 중간급 이상의 경제 쇼크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 상황에서 금리를 인상하면 중산층 가계의 집단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러한 데 정부의 굳건한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각종 개혁과 규제 완화 등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정치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새해 들어 연말정산과 건강보험료 파동은 국민들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나아가 여야 새 지도부 선출, 총리를 포함한 내각 및 청와대 개편 등의 이슈로 경제 논의는 더욱 멀어져가는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월 1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25분간 무려 42차례 경제를 강조했다. 시간 날 때마다 경제 회복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정국 흐름은 달리 가고 있다. 각종 정책을 둘러싼 진통, 내각 청와대 개편에 따른 정치권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올 한해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하반기 들어서면 정치권은 총선 체제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다. 시간이 그만큼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히 정부의 리더십과 민첩한 움직임이 중요하다. 하지만 각료 등 정부 인사를 만나보면 정치권, 각종 인사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뿐 오히려 공직자가 더 흔들리고 있다고 느낄 정도다. 지난 연말 한 정부 고위 인사로부터 들은 얘기는 충격적이다. “요즘 어떠십니까?”라는 안부에 “그냥 시키는 일 하는 거죠”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한 조직의 수장인 그가 이같이 언급할 지언데, 과연 구성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요즘 관가는 퇴직 공직자의 재취업 제한이 더욱 엄격해지는 이른바 관피아방지법(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시행일(3월 31일)을 앞두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지느라 바쁘다고 한다. 재취업을 포기하고, 가늘고 길게 정년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나은지 등등에 대한 고민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열심히 하라고 외치고, 사정기관을 동원해 공직기강 다잡기에 나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한 허사다. 각각 할 말은 많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13년 이상 ‘정운갑의 집중분석’을 진행한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과거 각 부처 공무원들은 국, 실장은 물론 장·차관, 청와대 수석, 정책실장까지 나서서 경쟁적으로 TV 대담이나 지면을 통해 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통령 해외 순방 때는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현장에서 전화 연결 등을 통해서라도 정상회담의 의미 등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TV 화면에서 장·차관들이 정책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수석비서관들이 출연하는 것은 아예 금기시하는 듯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중앙은행 총재, 금융기관장, 기업 CEO 등도 마찬가지이다.
97년 외환위기 상황 때 당시 모든 언론사의 주요 기사는 오랫동안 금융위에서 나오는 기사였다. 구조조정이 화두였고 은행 통폐합, 기업 퇴출 등이 빈번했다. 당시 금융위 기자실의 한 장면. 이헌재 금융위원장은 예고 없이 기자실에 내려와 “어 모기자, 어제 기사 잘 봤어. 몇 가지 보강되면 더 좋았을 텐데… 나한테 직접 전화해” 언론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수시로 토론하고 설득해나갔다. 그러면서 기업과 금융기관 문을 하루아침에 닫아야 하는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입만 열면 소통을 말한다. 경제 핵심 주체인 가계, 기업, 정부 간의 진정한 소통이야말로 지금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부터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복지 등 국가적 이슈에 대해 설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장·차관 등 내각, 청와대 수석들의 적극적인 움직임, 언론의 역할 등이 조화로워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경제주체들이 국가적 이슈에 대해 견해차를 좁히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매번 정치권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설득력도 부족하고,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필자는 오래전부터 21세기에는 ‘현상유지’라는 단어가 사라졌다고 말해왔다. 국가, 기업, 개인 누구든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해 나가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