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용 칼럼] 국민소득 3만 달러, 불편한 진실 그리고 희망
국민소득 3만 달러, 불편한 진실 그리고 희망
박진용 한국일보 논설위원
“2013년 국민소득은 2만 6,205달러다. 2015년에는 3만 달러 안팎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잠재성장률 수준인 3%대 중반이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2021년 4만 달러, 2024년 5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4일 내놓은 보고서 <5만 달러 국가의 조건>에 나오는 대목이다. 잠재성장률 3% 중반 달성을 전제로 깔고 있어 1인당 국민소득이 2021년 4만 달러, 2024년 5만 달러를 기록할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올해 3% 중반쯤으로 여겨지는 성장률을 감안하면 2015년이 3만 달러를 찍는 원년이 될 듯하다.
국제통화기금(IMF)도 201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807달러에 달해 세계 주요국 중 24위로 한 단계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1995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지 20년, 2007년 2만 달러 시대에 들어선 지 8년 만에 선진국 진입을 가늠하는 주요 척도인 3만 달러 고지에 등정하는 셈이다. 아프리카 우간다 수준의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나라가 광복 70년 만에 이런 쾌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니 대견스럽고 또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작금의 국내 분위기는 이와는 딴판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관론만 팽배하다. 국내외적으로 저성장과 장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가계보다는 기업으로, 가계 중에서도 고소득층으로 쏠리면서 국민이 체감하는 소득이 3만 달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인식 때문이다.
사실 3만 달러의 소득은 작은 게 아니다. 원ㆍ달러 환율을 1,100원으로 치면 국민 1인당 소득이 3,300만 원, 4인 가족으로 치면 1억 3,200만 원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업소득이 포함돼 있어 개인의 실제 소득은 이보다 훨씬 낮다. 국민소득에서 기업과 정부 부문을 뺀, 가계 실질소득을 나타내는 1인당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은 지난해 1만 4,690달러(1,600만 원)로 4인 가족 기준 대략 6,000만 원쯤이었다. 선진국은커녕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셈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전체 소득에서 가계소득 비중은 하락한 반면 기업소득 비중이 지속적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구소득이 6,000만 원이라면 감지덕지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해 말 나온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빈곤층(전 국민 가운데 소득이 중위소득(2,236만 원)의 절반(1,118만 원)미만인 계층)은 전체 인구의 16.4%인 800여만 명으로 6명 중 1명꼴이다. 또 10가구 중 1가구가 최저생계비(4인 가구 기준 월 163만 원)도 벌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었다.
급증하는 가계부채와 뛰는 전셋값 속에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면서 국민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양극화에 따른 소득 격차와 사회 불평등 현상이 심해지고 있으니 올해 3만 달러를 넘어선다는 소식이 마냥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선진국이 됐다는데 그 성장의 과실은 누가 다 가져갔느냐, 그런 성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항변도 들린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20세기에 가장 비약적 발전을 이룬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미국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의 언급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인구 5,000만 명이 넘으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나라(30-50클럽)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이 전부다. 인구 미달(3,500만 명)로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캐나다를 합치면 모두 G7에 속한 국가이다. G7에 속하지 않은 나라, 2차 대전 이후에 경제개발을 시작해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을 돌파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건 엄연한 팩트다. 더욱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달성하는 위업이다. G7 국가들이 2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수직 상승하는 데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세계 경제 호황 국면이 뒷받침했음을 감안하면 한국의 성취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물론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심각한 건 분명하다. 한국이 IMF 이후 지난 18년 동안 상황이 나빠지면서 소득불평등을 야기하는 핵심 요소인 임금불평등의 정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세 번째로 높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2011년 ‘1대 99’ 사회를 비판하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미국을 강타했던 일이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지난해 저서 <21세기 자본>을 통해 불을 지핀 소득 불평등 논란이 지금도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건 단적인 예들이다.
중요한 건 3만 달러 달성의 쾌거마저도 빛이 바래게 만들 정도인 불평등과 이로 인해 비등하는 사회적 갈등을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문제는 성장을 통한 분배든, 분배를 통한 성장이든, 가장 기초가 되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지 않고는 이를 풀어낼 신통한 묘수가 없다는 데 있다.
흔히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을 결정하는 건 노동 및 자본의 투입, 그리고 (총요소) 생산성 등 세 가지로 거론된다. 그런데 경제가 선진국처럼 성숙해지면 노동이나 자본의 투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거나 정체되고 총요소 생산성이 중요해진다고 한다. 총요소 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을 뺀 모든 요소들의 성장기여를 측정하는 것인데, 기술이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 문화 안보 등의 모든 변수가 생산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된다. 결국 한국경제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총요소) 생산성 증대를 통한 잠재성장률 향상에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생산성을 직접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술개발과 혁신은 긴요하다. 이를 위한 연구개발(R&D)투자가 대폭 확대되어야 하고, 그런 투자의 효율성이 높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절대 규모에선 작지만 국가 경제규모 차이를 반영한 상대적 지표에서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2012년 기준 4.36%에 달해 제조강국 일본(3.35%) 독일(2.98%) 중국(1.98%)에 모두 앞섰다. 앞으로 이 부분이 질적 양적으로 더욱 확대돼야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는 해마다 그 정도가 심해지는 추세이다
이와 함께 노사간 갈등과 반(反)기업 정서 등 기업의 경쟁력과 투자를 가로막는 사회갈등 구조를 끝내고, 사회의 시스템 효율화를 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사회 각 부문에서 신뢰와 준법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 없이는 요원한 일이다. 작금의 한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 수위를 생각하면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할 정도다. 지난해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갑(甲)질 논란이 보여주듯 강자와 약자의 반목과 대립, 영화 <국제시장> 세대와 드라마 <미생세대>로 대표되는 세대간 갈등, 통상 임금과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노사간 갈등은 이미 위험 수위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나라별 사회갈등을 지수화해 분석한 결과 한국은 사회갈등 지수가 0.71로 OECD 회원국 중 4번째로 높았다. 특히 갈등의 경제적 비용이 GDP의 27%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매출액 기준으로 삼성이 GDP의 11%, 현대차가 8%를 포함해 4대 그룹 전체가 25% 수준임을 감안할 때 엄청난 규모다. 5년이 지난 지금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갈등 비용을 대폭 줄이는 건 4대 그룹을 하나씩 더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성장의 ‘질’도 좋아져 분배도 개선될 뿐 아니라 당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실현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올해 노동시장을 포함한 구조개혁이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 정부는 어떻게 사회적 자본을 쌓아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구조개혁을 통한 경쟁력 강화도, 분배문제 개선에 대한 사회적 실마리 발견도 쉽지 않다. 어쩌면 한국사회의 돌파구 내지는 새로운 희망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서 찾아야 한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