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스토리/칼럼노트

해외 직구의 정치경제학

FKI자유광장 2014. 11. 25. 18:12


해외 직구의 정치경제학

- 박진용 한국일보 논설위원

 

사위가 캄캄한 금요일 새벽 4시 시내 쇼핑센터. 매서운 바람을 뚫고 졸린 눈을 비비며 차를 몰아 도착했더니 이미 인파로 장사진이다. 개장과 동시에 물밀 듯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인파 틈에 끼어 미리 점 찍어둔 상품코너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지만, 품절이다. 허탈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전리품이라도 챙긴 듯 물건을 들고 환호성을 지르고, 어느새 전자제품을 산더미처럼 실은 대형 카트를 낑낑거리며 끌고 가고, 한 제품을 놓고 서로 먼저 차지했다고 드잡이를 하고…. 이런 쇼핑 광란이 또 있을까 싶었다.

 

▲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쇼핑이 이뤄진다고 하는 날 입니다 (출처:ecanadanow.com)

 

6년 전 미국 대학 연수시절 경험한 블랙프라이데이(11월 마지막 주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할인행사 이벤트)의 한 장면입니다. 이날부터 12월 크리스마스까지 미국 전역에서는 품목별로 50%~90% 싸게 파는 폭탄세일이 쏟아집니다. 크리스마스 때 가족이나 친지들과 주고받을 선물 쇼핑에 나서 상점마다 한 해 매출의 30% 이상이 이 기간 일어난다고 합니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요즘 미국인들만의 행사가 아닙니다. 인터넷을 통한 해외 직접구매(직구)가 유통의 큰 흐름으로 떠오르면서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맘때면 국내 소비자들이 더욱 들썩들썩하고 있습니다. 직구는 2010년경 국내 배송 대행업체들이 생기면서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직구를 돕는 각종 사이트와 대행 서비스, 금융권의 카드할인 혜택까지 등장하면서 젊은 층 뿐 아니라 중장년층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구입 품목도 유아용품이나 의류, 신발 가방 서적을 넘어 TV 휴대폰, 심지어 자동차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직구는 건수로 1,116만 건, 금액으로 1조 1,029억 원에 달했는데요. 올해는 8월 기준 988만 건에 1조 원을 돌파했고, 이런 추세로 연말까지 가면 1조 5,000억 원을 가뿐히 넘어설 전망이라고 합니다. 

 

이달 초 한 온라인 쇼핑 사이트가 고객 2,48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번 주 블랙프라이데이에 직구 계획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71%였고, 직구를 하는 이유로는 관세와 배송비를 고려해도 국내보다 싸다는 의견이 무려 75%에 달했습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쇼핑 트렌드가 아니라 기존의 소비 채널을 뒤바꿔 놓는 ‘유통 혁명’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소비자들이 직구에 나서는 주된 동기는 해외 유명상품을 반값,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하 값에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국내에서 해당 제품을 제값 주고 사는 소비자는 봉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실제 아이스크림부터 와인, 유아 용품, 명품 시계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판매되는 수입 상품들은 독점 수입 업체가 높은 중간 마진을 붙여 미국 일본 등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 상반기 관세청 분석 결과 수입가격이 1,423원인 립스틱의 경우 14.87배나 높은 2만 1,150원에 팔리고, 3,735원에 수입된 칠레산 와인이 주류매장 판매가격이 5.34배인 2만 450원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직구의 확산은 이런 불합리한 유통 구조를 뜯어고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값싸고 다양한 제품을 즐기는 소비자의 이용후생을 한층 증대시킬 게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외국 유명 브랜드와 일대일 독점 계약을 맺고 국내 소비자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직구의 긍정적 효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게 또 있습니다. 이런 직구가 갈수록 진화하면서 국내의 불합리한 유통구조뿐만 아니라 제조업체의 생산시스템 자체를 바꿔 놓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구의 대상이 주로 국내에 들어오는 해외유명 브랜드를 넘어 국내기업 제품에까지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블랙프라이데이 시즌, 줄을 서서  계산을 기다리는 소비자들 (출처:starnewsonline.com)

 

특히 수입업자뿐 아니라 국내 제조업체도 자사 제품을 국내 소비자에게는 비싸게 팔고, 외국에서는 싸게 판매해 국내 소비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이 번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데요. 실제 국내기업이 생산한 같은 제품이라도 내수용은 해외판매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팔리는 사례가 종종 있다는 점도 이런 인식을 더욱 굳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생산된 동일사양의 제품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심지어 국산 최고급 승용차의 경우 미국에서 사면 세금과 운송비 등을 빼도 국내에서 사는 것보다 몇천만 원이 싸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국산 TV가 미국에서 100만 원인데 국내에서는 140만 원에 팔린다고 합니다. 실상이 이렇다면 직구를 이용할 경우 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누가 국내에서 제품을 구매하려 들까요?

 

이런 분위기 탓인지 최근 국내 제조업체들이 해외에서 생산, 판매하는 TV를 소비자들이 직구로 구입하는 것이 인기라고 합니다. 2011년 184대, 2012년 228대였던 TV 해외 직구는 지난해 3,450대로 1년 만에 15배가 늘더니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1만 2,000대를 넘어섰고, 연말까지 2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직구의 확산이 제조업 전체로 확산은 국내 제조업 공장의 공통화·일자리 축소 등의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는 TV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 직구가 더욱 확산되면 이런 현상은 국내에서 만드는 제조업 제품 전반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니까요. 왜 문제가 심각한지 TV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도록 하죠. 가령 삼성전자가 광주 공장에서 생산한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TV와 해외 공장인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만든 <메이드 인 멕시코> 제품의 품질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삼성전자의 엄격한 관리시스템에 입각해 거의 붕어빵을 찍듯이 동일한 규격과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내 인건비와 부품 조달비 등을 감안할 때 국내에서 팔리는 가격은 멕시코에서 만들어 미국 시장에서 내다 파는 제품보다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전자 측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메이드 인 멕시코>에 비해 가격은 비싸고 마진은 오히려 더 적다”고 말합니다.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 직구로 가격이 저렴한 <메이드 인 멕시코> TV를 사는 건 합리적인 의사결정입니다. 이로 인해 소비자도 좋고,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마진이 좋아 돈을 더 버니 나쁠 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의 광주 공장입니다. 글로벌 생산 소비 체제에 편입된 제조업체가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덜 드는 해외로 공장을 내보는 게 유리하다는 건 상식이죠. 하지만 고비용이 드는 국내 공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건 경제 문법으로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장을 해외 이전할 경우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와 일자리 축소 등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장 지역구 의원들과 지자체부터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회사는 손해를 보면서 근로자 일자리를 보전해 주기 위해 공장을 계속 돌리든, 아니면 온갖 비난을 무릎 쓰고라도 문을 닫고 멕시코 공장의 생산 규모를 확대하는 선택에 내몰리게 될 겁니다. LG전자라고 다를 까요. 아니 다른 제조업체들의 상황도 비슷해질 것입니다. 결국 거칠게 말해 광주공장 근로자를 친구로 둔 소비자들이 해외 직구에 매달린다면 그는 친구의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해외 직구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 시대에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물건을 며칠 만에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직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입니다. 누가 말린다고 정보 통신 혁명이 불러온 유통의 새로운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비싸게 주더라도 국내산 TV를 사야 한다는 걸 주장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강조하고 싶은 건 수입업자의 폭리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제조업체의 생산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직구의 다양한 측면을 함께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합리적 소비가 사회 전체의 합리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생계를 위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생산자로서도 보내는 ‘이중성’을 띤 존재라고 봐야지요. 직구가 대세로 된 시대는 개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소비’와 함께 나 자신과 주변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때론 ‘전략적 소비’를 해야 하는 문제도 야기할 것이 분명합니다. 선진국에서 자국산 제품이 다소 비싸더라도 더 큰 이익을 위해 ‘가치소비’를 선택하는 풍조도 이 때문입니다.


국내 제조업체들이 의도적으로 해외보다 국내에서 비싸게 제품을 팔고 있다면 이는 국내 고객들을 ‘호갱’으로 여기는 횡포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공장을 유지하면서 비싼 제조 원가를 감당해 빚어지는 문제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제조업체들이 외국보다 국내에서 더 비싸게 팔고 있는 제품가격을 낮추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비자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부분적 진실을 담고 있다 해도 다소 거칠게 들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