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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오형규 칼럼] 25만 공시족을 위한 변명

오형규 칼럼_25만 공시족을 위한 변명

25만 공시족을 위한 변명

-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아침 분주함이야 여느 거리나 다를 게 없지만 좀 색다른 곳이 있다. 젊은이들이 넘쳐나는데 어딘지 생기가 없어 보인다. 큰 가방, 처진 어깨, 표정 없는 얼굴, 잰 발걸음…. 길에는 컵밥 노점들이 줄지어 있고, 뒷골목에는 쉬는 시간마다 흡연족들로 그득하다. 공무원 시험 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노량진역 일대의 풍경이다.


오형규 칼럼_최대 스펙을 가진 청년들의 꿈이 공무원인 이유는?

  젊은이들은 다들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 꿈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란다. 이른바 ‘공시족(公試族)’, 즉 7급 또는 9급 공무원 공채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통계청의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보면 공시족이 25만7,000명이라고 한다. 실업자 통계에서 빠지는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시험 준비자 65만2,000명의 39.4%다. 10명 중 4명이 공시족이란 이야기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6년 이래 가장 많다. 실제로 올해 4,120명을 뽑은 국가직 9급 공채에 22만2,650명이 지원했다. 지방공무원(서울 제외) 9급 공채에도 1만1,359명 모집에 21만2,983명이 원서를 냈다. 적어도 20만 명 이상이 이런저런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사법·행정·입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공시족은 30만 명에 육박할 것이란 추정이다.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졌다는 한국 젊은이들은 왜 상명하복에다 영혼이 없어야 한다는 공무원이 ‘꿈’이 됐을까. 물론 청소년 희망직업 1위, 부모의 자녀 희망직업 1위가 공무원이 된 지 오래다. 최악의 취업난 속에 고용 불안, 노후 걱정까지 겹쳤으니 공무원만큼 안정적인 직업도 없지 싶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일까.


오형규 칼럼_민간보다 훨씬 나은 처우에 해외 유학과 교육까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것은 고용 안정, 정년 보장, 두둑한 연금, 칼퇴근, 덜 빡빡한 업무, 모성보호제도 등이 민간보다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정년 60세 의무화라지만 민간기업의 체감 정년은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0~60대에도 회사에 남아있으면 도둑)라는 판이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인구론’(인문계 9할이 논다) 시대에 공무원이란 직업의 이점은 한껏 높아졌다. 공무원이 박봉이란 것도 옛말이다. 10대 그룹만큼은 못해도 중견기업보다는 낫다. 한국경제연구원이 평생 수입을 추정한 결과 공무원은 정년까지 30년 근무했을 때 평생 소득(공무원연금 포함)이 최대 14억5,800만 원이다. 500인 이상 민간 기업에서 30년 근무한 사람의 평생 소득(국민연금 포함) 15억9,700만 원보다 낮지만 25년 근무자의 12억6,500만 원보다는 높다. 중소기업은 30년 평생 소득이 12억2,300만 원에 그친다. 부모들이 자녀가 어설픈 직장에 들어가느니 공무원이 되라고 권유할 만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중앙부처 공무원 60여 명을 국비로 해외 유학까지 시켜준다. 월급은 물론 가족 왕복 항공료, 2년여 동안의 체재비를 모두 정부가 지원한다. 광역 시·도까지 포함하면 줄잡아 200여 명의 공무원이 매년 국비 유학기회를 얻는다. 공무원의 가방끈이 길어진 효과가 나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몰라도 그 비용이 국민 세금이란 점은 분명하다.


오형규 칼럼_신분 질서가 뿌리깊은 한국사회, 공무원은 여전히 갑에 위치

  공무원이 되면 경제적 이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관존민비(官尊民卑),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신분 질서가 뿌리 깊은 게 한국 사회다. 조선 시대에는 관직에 나가야만 출세(出世)였고, 나라 벼슬을 해서 후손이 제사 지낼 때 지방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를 면하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런 DNA가 모두 사라진 게 아니다. 동창 모임에서 출세한 공무원이 먼저 소개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려울 때 민원 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옛날 과거시험처럼 요즘 공무원 시험 합격은 마을잔치라도 열 만한 경사로 여긴다. 지방에 가면 공무원 시험 합격자 명단을 적은 현수막이 걸린 곳이 적지 않다.

  공무원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갑(甲)이고 관치 사회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 소신(?) 관료도 있다. 사업을 해본 사람이면 인·허가권을 쥔 공무원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뼛속까지 느낄 것이다. 김영란법이 생겨난 이유도 다른 게 아니다. 대가성이 있든 없든 늘 대접받는 공직자 같은 갑을 규제하자는 것이 아닌가. 수시로 터져 나오는 법조 비리, 방산 비리, 공직자 비리를 보면 공무원에게 수억 원을 갖다 주고 향응과 선물을 안겨도 남는 장사인 모양이다. 게다가 공무원은 퇴직 후 낙하산 재취업과 전관예우도 기대할 수 있다. 민간에 이보다 더 짭짤한 직업이 어디 있겠나 싶다.


오형규 칼럼_취준생이 바라는 건 기회균등과 공정성

  하지만 청년들이 시작부터 ‘갑질’을 하려고 공무원이 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취준생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선발과정에서의 기회균등과 공정성이다. 청년들이 유독 취업청탁, 채용비리에 예민한 이유다. 공무원 시험은 자신이 낙방해도 승복할 수 있는 시험으로 여긴다. 삼성그룹이 10만 명 이상 몰리는 공채시험을 폐지하려다 거센 반발에 부딪혀 없던 일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공무원 시험은 나이, 학력, 출신, 배경에 대한 제한이 없고 ‘지여인’(지방대 인문대 출신 여학생)도 오로지 시험만 잘 보면 합격할 수 있다. 정실, 연고, 빽이 아니라 실력대로 경쟁하는 조건이면 누구나 결과를 받아들인다. 뒤집어 보면 승복하지 못하는 채용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형규 칼럼_관료공화국에서 청년들에게 도전을 권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사회가 점점 ‘관료의, 관료를 위한, 관료에 의한 나라’가 되어간다는 데 있다. 공무원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간섭하고 결정하는 나라란 것이다. 공무원이 ‘노(No)’ 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관료 공화국에선 민간의 창의와 혁신이 왕성하게 일어날 리 만무하다.

  심야 콜버스와 헤이딜러 논란에서 보듯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해도 견고한 기득권 구조를 깨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콜버스는 서울 강남역 등 심야에 택시가 태부족인 지역에서 전세버스를 이용해 택시의 절반 가격으로 운송해주는 스타트업이다. 하지만 택시업계의 집단 반발에 부딪혀 표류하다 1년 만에야 간신히 기존 택시회사를 통해서만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심야 택시 부족의 원인이 바로 택시업계에 있는데도 택시업자만 가능하게 정부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중고차 경매서비스를 제공하는 헤이딜러는 법에 막혀 여전히 표류 중이다. 지난해 슬그머니 개정된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온라인 경매사업자도 무조건 경매장 200㎡, 주차장 3,300㎡를 확보해야 사업이 가능하게 된 탓이다. 이 법이 누구에 의해 왜 개정됐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저비용 경쟁자의 진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아이디어 창업에 따른 혁신 프리미엄은커녕 기득권의 철옹성에 규제는 산 넘어 산이다. 이런데도 청년들에게 창업에 도전하라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을까.

  공무원 천국을 만들어놓고 청년들이 패기 없이 공시족이 됐다고 개탄해봐야 소용없다. 우수한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것은 국가적으론 손실이지만 개개인에겐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다. 공무원 천국에서 탈피하는 길은 ‘작은 정부’ 외에 없다. 공시족에게는 잘못이 없다.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