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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스토리/칼럼노트

[김기천 칼럼] ‘중산층 경제’가 가능하려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새해 국정연설에서 오바마 2기(期)의 핵심 정책 과제인 ‘중산층 경제 재건’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소수에게만 유별나게 좋은 경제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노력하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소득을 높이는 경제에 충실할 것이냐”고 물은 뒤 “대답은 확실하다. 중산층 경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학자금 저축 면세 혜택제도 529플랜, 고소득층에게 더 유리하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중산층 지원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529 플랜’으로 불리는 학자금 저축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폐지하겠다고 했다가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529 플랜은 미국 중산층 가정이 자녀의 대학 학자금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투자 수익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산층보다는 고소득층의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산층 가구가 자녀 출생 직후부터 매년 3,000달러씩 17년간 학자금 저축 계좌에 불입할 경우(수수료를 제외한 연간 투자수익률을 6.5%로 가정) 18년 뒤 5,800달러 정도의 비과세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여유가 있는 부유층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 최고 한도인 14만 달러를 한꺼번에 불입해 18년 뒤 세금 감면으로 8만 3,200달러의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저축할 여력이 별로 없는 중산층-서민보다 고소득층이 훨씬 큰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529 플랜 폐지 선언, 중산층 혜택이 사라진다며 반발하는 언론


 실제 529 플랜에 따른 세금 감면 혜택의 70%가 연간 소득 20만 달러 이상 가정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저소득층 대학생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고소득층이 주로 혜택을 본다는 사실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고, 중산층 가구들이 몇 백~몇 천 달러의 혜택을 잃는다는 사실만 강조되면서 여론이 아주 나빠진 탓입니다. 견디다 못한 백악관은 결국 일주일 만에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계와 체감의 괴리, 고소득층 상당수가 자신이 중산층이라 생각


 학자금 저축 논란은 통계상의 중산층 개념과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다른 데서 빚어진 일입니다. 미국 중산층의 통계적 기준은 3만 5,000~10만 달러 정도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중산층 살리기 정책도 이 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보는 중산층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뉴욕 같은 대도시 가구는 연간 20만 달러를 벌어도 세금과 각종 보험료 내고, 모기지론과 자동차 할부금 갚고, 자녀 교육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고소득층의 상당수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고, 학자금 저축에 대한 비과세 폐지에 반발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중산층 개념과 인식 사이의 괴리가 매우 큽니다. 중위(中位) 소득의 50~150% 가구를 중산층으로 보는 OECD 기준에 따르면 한국 중산층 가구(4인 가족)의 월 가처분소득은 180만~530만 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월 180만 원 정도 버는 가구가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국내 중산층 가구의 55%가 스스로를 저소득층으로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반대로 월 1,000만원 정도를 버는 가구들은 상위 10% 이내의 고소득층에 속하지만 대부분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소득이 늘었으나, 삶의 질 악화로 체감소득이 감소했기 때문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내 중산층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990년 82만 원에서 2013년 384만 원으로 연평균 7.0%씩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주거비와 교육비 지출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나 중산층의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중산층 가구의 소비지출에서 오락-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5.9%에서 5.3%로 축소됐습니다. 삶의 질이 악화됐으니 소득이 늘어도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고소득층 가구라 해도 극소수의 진짜 부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정이 비슷합니다.


중산층을 위한 정책, 정부와 국민의 눈높이 중 어디에 맞춰야 할까?


 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입안(立案)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의 눈높이가 달라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연말정산 과정에서 세금 폭탄 논란이 벌어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부는 2013년 세법을 개정하면서 소득세 부담이 늘어나는 기준을 당초 연 소득 3,450만 원 이상에서 5,500만 원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그 정도면 세 부담이 조금 늘어나는 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통계상으로는 고소득층에 속하지만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생각하고 있는 월급쟁이들은 “중산층에까지 이렇게 세 부담을 늘릴 수 있느냐”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다고 중산층 기준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선거 때마다 여-야 정치권은 너 나 없이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며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상 보육, 기초연금, 반값 등록금 같은 보편적 복지 공약은 대부분 중산층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의 세 부담까지 덜어주겠다고 하면 정부 재정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재정 파탄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중산층 경제가 가능하려면 중산층에 대한 개념과 인식 사이의 괴리부터 좁혀야 한다


 중산층 경제가 가능하려면 중산층의 개념과 인식 사이의 괴리부터 좁혀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거비와 교육비 부담을 줄어들도록 해 중산층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한편으로 고령화 추세에 맞춰 일정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려면 중산층의 세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가 경제의 핵심 생산-소비 계층인 중산층이 복지 혜택만 누리고 그에 따른 비용은 치르지 않겠다고 하면 경제가 온전히 굴러갈 수 없습니다. ‘중산층 경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로운 과제입니다.


김기천 조선일보 논설위원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