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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스퀘어/요즘뜨는이야기

[한국의 컬덕트 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마지막 브라운관 TV LG 14SR1EB

컬덕트 (Culducts : Culture + Product) : 한국의 IT강국이지만 정작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산 제품은 많지 않습니다. 재조명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 제품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의미에서 ‘한국의 컬덕트’를 연재합니다. 컬덕트는 시대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을 준 제품은 물론, 비록 판매에서 실패를 했더라도 일부 마니아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냈던 제품들도 포함됩니다.

 

한국에는 전자제품 회사가 많지 않습니다. 큰 기업은 삼성전자, LG전자 정도고 다른 기업들은 몇 가지 분야에 특화된 중소기업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대부분 대기업이 내놓는 제품은 평범한 제품이 많습니다. 시장조사를 통해 대중이 원할 만한 적당한 가격, 적당한 디자인의 제품을 출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혹 실험적인 제품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LG의 '14SR1EB'이라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이 출시된 해는 2009년으로 그동안 소개했던 컬덕트 제품 중 가장 최근에 출시된 제품이죠. 2009년 당시에도 대부분 TV는 PDP TV나 LCD TV였지만 이 제품은 CRT 방식, 즉 브라운관 TV였습니다. 2010년도에 신제품을 브라운관 방식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LG의 최초 TV 역사를 알리는 스페셜 버전

 

LG, 레트로TV

 

이 제품이 기획된 것은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HE디자인연구소 김준기 책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됩니다. 국내 최초의 TV였던 LG의 VD-191을 기념하며 특별판 TV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였죠. 다시 복습해 볼까요? 국내 최초의 TV는 LG가 만들었고, 19인치 크기의 흑백 TV였습니다. 그러나 LG가 최초의 TV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그래서 이러한 TV 역사를 알리고, 브라운관 TV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의도에서부터 시작된 기획입니다.

 
처음 기획은 2007년이었고, 실제 제품은 2009년도에 출시됩니다. 이 제품은 앞서 말했듯이 금성(현재의 LG) ‘VD-191’을 베이스로 디자인했습니다. VD-191은 1966년 출시된 아날로그 방식의 TV로 안테나가 있었고, 동그란 채널로 방송을 선택했죠. 그리고 TV 다리가 있었습니다. LG 14SR1EB 역시 이런 디자인 요소를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재현합니다. 국내 대기업이 내놓은 가장 독특하고 멋진 TV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뛰어난 완성도의 마지막 브라운관 TV

 

LG 14SR1EB은 브라운 색상과 경쾌한 오렌지 색상 두 가지로 발매됩니다. TV 아래쪽에는 마치 우주선 다리처럼 튼튼한 네 개의 크롬 다리가 위치하며, 상황에 따라 뗄 수도 있었죠.

 

클래식 TV


디지털 방식의 TV였지만 옛날 감성을 살리기 위해 철제 안테나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이 안테나를 빼서 칼싸움하기도 했죠. 압권은 로터리 채널이었습니다. 그 옛날에 "드르륵~"소리가 나는 로터리 채널은 아니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 돌리는 느낌과 소리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몸체는 하이그로시 플라스틱 재질이었습니다. 사실 세련된 디자인이지만 옛날 TV의 요소를 살렸기 때문에 상당히 묘한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제품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이런 재미있는 디자인 소품을 내놨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멋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치가 TV 본체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리모컨도 아주 간단한 형태로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했고, 심지어 박스조차 상당히 멋스럽게 디자인했습니다. 박스 디자인과 리모컨은 지금도 국내 산업디자인 역사상 가장 잘 만든 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었습니다. 14인치 화면이 너무 작다는 단점이었고, 가격도 다소 비쌌습니다. 그리고 브라운관 TV의 거친 입자와 왜곡현상 때문에 화질도 좋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단종 후, 치솟은 컬트적 인기

 

이 멋진 제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LG가 CRT 사업을 완전히 중단하면서 1년 만에 단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뒤늦게 이 제품을 접한 사람들이 중고장터를 뒤지기 시작한 것이죠.

 

LG, 레트로 TV

 


LG 14SR1EB은 29만 원에 출시됐지만 실제로는 21만 원 정도에 판매됐던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물건이 없자 나중에는 중고제품이 4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 거래되는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비록 브라운관 TV지만 디지털 방식이라 화질이 선명한 편이고, 레트로한 소품을 찾는 이들에게는 대안을 찾기 힘든 제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LG는 2013년에 '클래식 TV'라는 색다른 TV를 출시합니다. 이 제품은 일반 LCD TV에 클래식한 요소를 집어넣은 제품입니다. 이 역시 가격이 비쌌지만 일반 LCD TV와 동일한 기술에 클래식한 디자인 덕분에 신혼부부나 과거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은 32인치와 40인치 두 제품이 나와 있으며 예전 모델보다 훨씬 더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실험에서 시작되는 혁신

 

대기업은 기업문화나 분위기로 인해 실험적인 제품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LG 14SR1EB은 상당히 파격적인 실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제품을 출시했고, 후속작 역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만약 평범한 TV만을 만들었다면 놓쳤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셈이죠.

 

LG


최근 소비자들은 '필요'에 의한 구매보다는 '차이'에 의한 구매를 원합니다. 독특하고 나의 감성에 맞는 제품에 지갑을 열 각오가 되어 있죠. 물론 이런 제품을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성 있지만 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영진, 만들기 쉽고 기존 제품을 응용한 설계를 원하는 기술진, 색다르지만 저렴한 것을 원하는 소비자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험과 파격만이 정체되고 지루한 제품 사이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 내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더 색다른 컬덕트가 탄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1년간의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