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경제의 숨은 비결, 강소기업의 힘
지난 4월 9일 연세대학교와 삼성경제연구소 EU 센터(SERI-EU Center)가 공동 주관하는 ‘제 1차 EU 현지전문가 초청세미나’가 삼성경제연구소(SERI)에서 개최됐습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독일과 함께 유럽 제조업을 이끄는 이탈리아에 대한 주제로, 30여 년간 주교황청 대사로 근무한 김경석 대사(이하 김 대사)가 발제를 맡았습니다.
김 대사는 이탈리아 경제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는 문의 수호신으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김 대사는 이탈리아 경제가 강점과 약점이 확연히 부각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같이 비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경제는 피사의 사탑에 비유됩니다. 무너질 듯 하면서 무너지지 않는 모습에 붙여진 별명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를 바라 본 것입니다.
(이미지출처:경향신문)
실제 이탈리아는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에 빠져있고 GDP 대비 국가부채가 100%가 넘고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로부터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한 특성상 정치적으로 불안한 측면이 있으며, 행정 비능률 역시 극심합니다.
김 대사는 이탈리아에서 운전면허를 획득하는데 1달이 넘게 걸리고 웬만한 행정업무도 2주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소매치기와 바가지 요금이 성행하며 탈세와 비리가 많아 국가 경쟁력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국가 경쟁력 순위>
(이미지출처:기획재정부, 2012)
구체적으로 김 대사는 이탈리아의 높은 국가부채, 경직된 노동시장, 낮은 교육열, 폐쇄적인 금융시장, 비능률적 행정, 지하 경제 등이 이탈리아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라고 했습니다.
대학차등제가 없는 이탈리아는 대학 교육비의 70%가량을 국가가 부담하고 박사 과정까지 학비를 무료로 지원해주지만 고졸자 비율이 청년 연령 중 54%에 달한다고 합니다. 또한 지하경제 비율도 OECD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미지출처:서울신문)
최근 위기 여파로 금융시장도 폐쇄적인 편입니다. 은행(bank)이란 용어가 이탈리아 어(banca)에서 파생될 정도로 이탈리아는 서구 금융 시스템의 산실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효율적이지 못한 서비스와 700여 개가 넘는 영세은행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미지출처:한국경제신문)
그러나 이 와중에 이탈리아는 독일 다음으로 유럽에서 제조업이 강한 국가이며, 세계 최고급 제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소득은 우리의 1.6배 정도로, 풍요로운 의식주 생활을 즐긴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렴한 천연섬유를 사용하는 패션사업은 이탈리아의 강점이고 누구나 다 아는 피자, 파스타 같은 음식도 이탈리아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미지출처:세계은행, 2011)
김 대사는 이렇게 만족하고 즐기며 사는 이탈리아가 가능했던 것이 강소기업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을 선호하고 가족과 지역을 중요시하는 이탈리아에서 장인과 공방 제도가 모태가 된 중소기업이 지금의 이탈리아를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언급했 듯 이탈리아의 중소기업은 오랜 역사를 가진 장인, 공방 제도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 대부터 대기업과 경제발전의 양대축으로 성장했고, 70년대 이후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노조, 보조금 문제 등을 보완하는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중소기업의 비중은 무려 99.9%입니다. 기업 비중이 한국과 비슷한 수준인데 이들이 만드는 부가가치 수준은 70%에 육박합니다. 주목할 점은 고용인원이 10명 미만인 극소기업이 95%를 넘는다는 점입니다.
2010년 이탈리아 경제개발부에 따르면 극소기업의 수는 약 420만 개로 전체 기업의 95.1%를 차지하고 이는 독일, 영국 등 EU 국가와도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극소기업이 많다 보니 이들의 고용비중도 50%에 달합니다.
(이미지출처:이탈리아 경제개발부, 2010)
<기업 규모별 고용비중>
(이미지출처:이탈리아 경제개발부, 2013)
<기업 규모별 부가가치 비중>
(이미지출처:이탈리아 경제개발부, 2010)
김 대사는 이탈리아의 중소기업이 발달한 이유에 대해, ① 15인 이하 소기업, 노조간섭이 적음 ② 유연성, 특화, 전문화 ③ 직업 귀천이 없다는 자부심 ④ 클러스터 내 경쟁에 따른 혁신 ⑤ 갑을 간 신뢰관계 ⑥ 해외시장 겨냥 등의 원인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소규모 기업이 규모의 경제에 불리하고 세계 최고급 제품이지만 적게 생산하므로 저생산성으로 성장에 한계가 있으며 상장기업이 없기에 자본이 부족하는 등 여러 약점도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소규모 기업이 수백만 개 있는 것이 이탈리아의 불행이 아니며 제품 고급화를 통해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기에 Made in Italy 제품에 주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상장은 지금의 이탈리아 시스템과 맞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 대사는 이탈리아 중소기업이 발전하게 된 요인으로 산업 클러스터를 꼽았습니다. 클러스터란 현대산업단지 같이 여러 기업이 모여 이뤄진 하나의 단위체입니다. 이탈리아 클러스터의 특징은 특정 제품과 생산 라인에 특화됐고 같은 클러스터 내 기업 간, 지역기관 간 네트워크가 강하게 연결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경쟁적인 혁신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내 20개 주 정부가 지정한, 약 200개 정도의 클러스터가 있는데 입법화 된지 20여 년 밖에 안됐습니다. 그 전까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하는데, 주요 품목으로는 커피, 섬유, 의류 외에도 귀금속, 가구자재, 가죽 및 신발 등이 있습니다. 원체 다양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도 정확한 통계를 내리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미지출처:유럽클러스터정책 33호)
이탈리아 내 클러스터는 여러 클러스터가 조합해 하나의 체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수평인 결합을 통해 세계 산업을 선도하기도 하고, 직업훈련학교나 연구소 등과 협력하기도 합니다. 현재 약 4,000여 개 직업훈련학교가 200개 클러스터 내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로존 재정위기로 인해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으며 중국 등 경쟁국의 저가제품 공세로 많은 클러스터에서 기업수와 고용이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의류/캐주얼 클러스터 중 하나인 Val Vibrata에서는 20년 간 2만 명에서 2,000명으로 고용이 확 줄었습니다. 따라서 혁신을 통한 제품 고급화 및 해외시장 개척, 전략적 제휴를 통한 경쟁력 강화 등이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김 대사는 밝혔습니다.
세미나 말미에 김 대사는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3대 불안으로 노후, 자녀교육, 의료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직업 재훈련, 정규직 기반 기업 운영 등 직업 안정화를 통해 한 곳에서 오래 일하면 전문화가 되는 풍토를 만들고, 의료비 지출에 대해 정부와 민간이 함께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창조경제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에서 독일과 스위스 등을 롤모델로 직접 강소기업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경제신문에서는 독일의 마이스터와 중소기업을 특집으로 연재기사를 낸 적도 있습니다. 마이스터 제도는 독일이 가진 독특한 기능인력제도로 실제 현장경험과 손기술로 최고에 오를 수 있는 인재를 만드는 형식입니다. 분명 글로벌 경제위기로 저성장의 늪에서 숨어있는 강소기업을 발굴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만이 가진 중소기업의 장점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김 대사는 높은 세금과 노동시장의 경직성에도 특화와 전문화로 한 우물만 파는 점이 6,000여 개의 강소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했음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산업 클러스터와 협력과 연계를 통해 특화된 기술향상을 꾀할 수 있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이탈리아 사람의 성격을 적극 활용 가능하며 우리와는 다른 직업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모델임을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탈리아를 축구를 좋아하고 피자와 파스타를 주식으로 커피를 즐겨 마시며 패션강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탈리아의 일부, 고작 10%의 모습입니다.
숨은 유럽의 강자 이탈리아, 그 비결은 수천 개에 달하는 강소기업과 그들만의 클러스터에 있습니다.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이탈리아인의 정신을 배우고 그들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여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더해진다면 우리도 강소기업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 본 게시물은 자유광장 서포터즈 학생들의 제작물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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