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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스퀘어/요즘뜨는이야기

우리는 밥을 파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시간을 판다

 
오진권|이야기가 있는 외식공간 대표이사
등학교 1학년 때 집에 차압이 들어와 온통 빨간딱지가 붙었다. 어머니 혼자서 4남 1녀를 키우셨는데,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생활전선에 바로 뛰어들었다. 의정부에서 구두닦이, 명동에서 껌팔이 등 온갖 험한 일을 다 경험했다.
 
이런 내게 인생의 전환기가 되어준 것은 바로 군대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던 내게 유일한 희망은 하루빨리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신체검사에서 떨어졌고, 그러던 중 후암동의 어느 게시판에 붙은‘육군기술 하사관 모집’이라는 공고를 봤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바로 지원했고, 1주일도 안 돼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
 
안양에 있는 공병단에서 근무할 때, 단장님께서 부르시더니 사병식당을 맡아보라고 하셨다. 음식의 맛은 자고로 첫째가 재료요, 둘째가 정성이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깍두기를 담고, 국 끓이고, 삽으로 쌀을 씻고 했더니 ‘짬밥’이‘사제밥’으로 변했다. 사병식당을 맡은 지 일주일 만에“오 중사를 계속 반장으로 시켜달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지휘관께서는 간부식당도 맡아보라고 했다.
 
메뉴 정하기와 장보기, 조리까지 직접 했는데, 나중에는 종로 2가에 있는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요리를 배워 그날그날 배운 것을 다음날 바로 조리해 단장님을 비롯한 높은 분들께 배식했다.
+ 식당경영에 눈을 뜨다
그 시절, 난 스스로 식당경영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내복귀하면서부터 기찻길 넘어오는 구름다리에 ‘구름다리’라는 상호로 라면, 튀김 등을 파는 네 평짜리 작은가게를 하나 냈다. 부대에서 퇴근하면 가게로 달려가곤 했는데, 그게 1975년의 일이다.
 
그런데 장사라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5년 4월, 11년의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기까지 명동칼국수 분점과 양식레스토랑, 스탠드바, 그리고 안양시내 최대 클럽의 공동사장까지 했으나 한 순간에 홀딱 망하고 말았다.
 
이후 택시기사를 33개월 동안 했는데,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않아 다시 식당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가진 돈이라고는 퇴직금까지 다 털어도 300만 원뿐이었다. 결국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3만 원짜리인 다섯 평짜리 가게를 얻어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꼼장어와 닭똥집을 팔았다. 한 20여 일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서울시내의 음식점들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다.
 
청계천 8가에 있는‘할머니 보쌈’, 영동시장 골목 안에 있는 ‘동장군 보쌈’, 가리봉 5가에 있는 보쌈집들을 돌아다니면서 ‘보쌈’으로 승부를 걸어보자는 판단이 섰다. 다섯 평짜리 가게에서‘보쌈’으로 재도전했는데, 이게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개업한 지 한 달 반 만에 가게를 12평으로 늘렸다.
+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라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가게 이름을‘놀부보쌈’이라고 정했다. 그런데 놀부집이니 흥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김치를 버무려서만 낼 게 아니라 속이랑 따로 내보자고 말이다. 그때 난 주방에서 수육을 2년 반 정도 썰었는데, 손님을 보지 않고는 절대 고기에 칼을 대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이 오면‘질보다 양’이니까 뻑뻑한 살을 접시에 가득 담아줬고, 술꾼들이 오면 비계살을, 그리고 제일 까탈스러운 아주머니 손님들에게는 부들부들하고 마블링이 있는 좋은 고기를 내놨다.
 
손님들은 두세 명이 일행일 경우, 대부분‘놀부 한 접시와 동동주 하나’를 주문하곤 했는데, 다섯 명 이상일 땐‘놀부도 하나, 흥부도 하나’를 주문했다. 찬찬히 보니, 흥부보쌈인 배추보쌈이 먼저 바닥을 드러냈다. 흥부가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다.그날 밤, 바로 놀부를 흥부로, 흥부를 놀부로 메뉴판을 수정했다. 다음날부터 놀부가 더 많이 팔리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창조는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거기서 창조의 발상이 나온다. 식당 경영도 마찬가지다. 동대문 옷 시장에 가보면 패션 스타일의 주기가 일주일 만에 바뀐다. 그래서 나도 메뉴를 배추보쌈, 모듬보쌈 등으로 계속 바꿔나갔다. 또, 중요한 것이 절대로 접시크기가 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판매개수를 분석해 보니 손님들은 반 접시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집 팔아 장사해서 성공하는 놈 못 봤다’는 말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미신은 절대 믿지 말라. 보쌈집을 할당시 내부 인테리어에 70% 투자하고, 외관에 30%를 투자했다. 나는 고객은 외부에서부터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7 대 3의 비율로 가게를 꾸민다. 이런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객은 바깥에서 자발적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 손님이 시키기 전에 하면 서비스요, 손님이 시켜서 하면 심부름이다
‘가게를 오픈한 지 얼마 만에 음식점의 성공여부를 알 수 있냐'는 질문에 나는‘1주일’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가시적으로는 고객의 안면근육 움직임과 카운터에 비치하는 명함이 없어지는 속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 가게에 온 손님들은 가끔 주변에 홍보를 해주겠다며 명함을 한 갑씩 달라고 하는 분도 계신다. 그런데 음식점에 와서 그냥 가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 분들은 떠날 때 말이 없다. 하지만 속으로는‘내 이놈의 음식점, 다시는 오나봐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식점을 하려면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해야 한다. 내가 힘들어야 하고, 반대로 고객은 행복하고, 편해야 한다. 내가 불편해지는 연습을 하자.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치과에 갔더니“왜 이렇게 치간 칫솔을 안 쓰세요. 치간 칫솔을 좀 쓰세요”라고 했다. 이것도 내겐 아이디어가 되었다. 며칠 있다가 대방역 근처의‘다이소’에 갔는데, 천 원에 오십개가 들어 있는 치간 칫솔이 있었다. 즉시, 우리 전 점포에 치간 칫솔을 비치하도록 했다. 500석 되는‘마리스꼬’같은 데에는 테이블에다 아예 세팅을 해놨다. 하지만 200석이 못 되는‘오리와 꽃게’같은 데에는 테이블에 세팅하지 않고, 계산대앞 위스키잔에 꽂아놓거나, 40대 이상 고객들이 오면 식사를 거의 다 하셨을 때쯤에 살그머니, 씩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 가져다 놓는다. 뒤돌아 오면 뒤통수가 간질간질할 것이다. 손님은 종업원의 뒤통수를 쳐다보면서‘아, 이 집은 역시’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점포에‘손님이 시키기 전에 가져다주면 서비스요, 손님이 시켜서 하면 심부름이다’라는 문구를 붙여 놨다. 우리 음식점에서 심부름이란 없다. 음식점은 용역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로 좌식을 고집하면 안 된다. 나는 18년 전부터 ‘양반다리’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지난 해, 헤럴드 경제에서 이런 기사를 봤다. ‘폼 나는 양반다리, 당신의 무릎관절을 좀 먹는다.’식당 사장님들께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할 때 식탁에 앉아서 먹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식사할때는 식탁, TV 볼 때는 소파, 잠잘 때는 침대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왜 고객들은 비닐방석 하나 가져다 놓고, 허리 아프고 무릎 쑤시게 만드는가. 그런 집은 점심, 저녁 잠깐뿐이다. 식당은 시도 때도 없이 잘 되어야 한다.
+ 배고픈 사람에서 밥 퍼주는 사람으로...
나는 구두닦이 시절 17살 나이에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가서 헌혈을 하고 밥을 사 먹었다. 그 돈을 가지고 남대문 자유극장앞에 가서 50원짜리 팥죽은 못 사먹고, 30원짜리 멀건 국물을 사먹었다.
 
이제 난, 배고팠던 사람에서 밥을 퍼주는 사람으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2006년 11월 이후부터‘밥퍼’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느 덧 5년이 되어 간다. 사당역 14번 출구 앞 노상에서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는데 하루에 평균 150명이 찾아온다.
 
나는 자기 전에 10~15초 생각한다. ‘나는 오늘 몇 %의 노력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골프를 칠 때도 힘을 빼야 공이 똑바로 가는데,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힘을 빼니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돈이 많은 것은 행복의 척도가 아니다. 돈이 많으면 편리하긴 하지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외식업은 어찌 보면 농사짓는 것이랑 똑같다. 뿌린 대로, 노력한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 그동안 나는 혼이 담긴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혼을 담은 노력으로 외식업을 할 것이고, 고객에게 밥을 파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시간을 팔 것이다.